서대문형무소의 독립운동가들 [성문 밖 첫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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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낮 최고기온 영하 7도, 포니 투 택시를 형무소에 대절 하고 낯선 여인네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재소자를 기다린다. 저 여인네가 박경리가 아닐까?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엎고는 교도소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중략)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해 보였고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풀포기의 모습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얼렀다.’
38,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서울 구치소)
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기자 시절에 쓴 글이다.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서울 구치소(1967년부터 1987년까지)에서 사위인 김지하의 출옥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손자 원보를 업고 어르고 달래며, 마당 저만치서 사위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김지하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친구, 지인, 기자 등이 구치소 문 앞을 가득 메웠다. 또 다른 여인, 김지하의 부인이자 박경리의 딸인 김영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옥문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럴 때 칭얼대는 아가는 할머니의 몫이다. 이곳에서조차 우선순위에 밀려 저만치에서 택시를 대절해 놓고 마음을 졸이고 있다. 기자 김훈은 소설가 박경리를 팔자 사납고 무력한 할머니, 교도소 마당의 풀 한포기보다도 못한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에 지어졌다. 나라의 권한이 대부분 일본으로 넘어간 시기다. 1905년 을사늑약, 1906년 통감정치가 시행됐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군대도 해산됐다. 정부의 법 집행이 일본에 넘어갔고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살리고자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죄수 아닌 죄수들을 가둘 곳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연판을 붙인 판자를 두른 형태였다. 감방이 480평, 수용인원이 500명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일제가 가장 먼저 지은 통치 공간이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전옥서에 수감돼 있던 죄수들이다. 종로 영풍문고 앞에는 황금색으로 칠해진 전봉준의 좌상이 있다. 그곳이 조선시대의 감옥, 전옥서가 있던 곳이다. 전옥서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이 이곳에 경성감옥이 건축되자 옮겨왔다.이곳에서 가장 먼저 사형당한 사람이 의병장 왕산 허위다. 1907년 정미년에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이 된다. 그들은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나라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전국 13도에 조직된 창의군(彰義軍, 의를 나타냄, 의병)에게 통문을 보내 경기 양주에 모이라 하니 1만여 명이 집결했다. 관동지역 대장 이인영이 총대장이었다. 그를 보좌한 사람이 경기지역의 대장 허위였다. 이들이 모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했다. 서울 진공 작전이라니…영화 제목같이 멋지다. 작전이 실현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다. 나라를 택할 것인가? 부모를 택할 것인가? 이인영은 효를 택했다. 유학자 의병장의 한계였다. 이인영은 급히 귀향하고 왕산 허위가 총대장이 됐다. 그는 의병 1만 여명을 이끌고 양주까지 진격했다. 발 빠른 선발 대원 300여 명과 함께 동대문 밖 30리, 10km 지점(현재 망우리)까지 진격했으나 사전에 일본군에 발각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이후 만주, 연해주 등지로 흩어져 무장 항쟁을 지속했다. 왕산 허위는 그 후 경기도 일원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됐다. 서린동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1908년 이곳에 경성감옥이 생길 때 이첩돼 순국했다.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km의 길에 그의 이름이 존재한다. 왕산로다.
일제는 의주로 넘어가는 ‘국중 1로’인 의주로 초입에 감옥을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 입구에 감옥을 만든 것이다. 해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400여 명의 독립지사들이 순국했다. 백범 김구선생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됐고, 수감생활을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식사량이 부족해 배고픈 것은 일상이었고 겨울에는 버선도 없이 찬 마룻바닥을 걸어다니다 보니 수감자 대부분이 발과 무릎에 동상이 생겼다. 인근의 안산과 무악에서 내려오는 삭풍이 살을 도려내듯이 추웠다.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메고 축항공사장에 출역을 한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동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간 채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한다.’ (백범일지)
백범 선생이 이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 했겠는가. 105인 사건과 3.1 만세운동 등 저항이 커지자 수감자도 늘어났다. 1920년, 재소자들의 힘겨운 노역으로 5백 명 규모의 옥사가 3천 명 규모로 증축됐다. 방사형으로 간수가 중앙에서 감방의 상황을 통제하고 감시가 편리하도록 했다.
1945년 8월 16일, 재소자들은 모두 중앙의 넓은 마당에 소집됐다. 놀랍게도 여운형 선생이 나타나 연설을 시작했다. 일본이 망한 것이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이 곳에 와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독립 소식을 전했고 모든 정치범들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본 천황이 8월 15일 옥음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으나 소음이 심해 이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선의 민중들이 해방을 온몸으로 실감한 것은 재소자들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종로까지 행진하면서부터다. 하루 전까지도 활개를 쳤던 일본 경찰과 관리들이 종적을 감춘 가운데 지하에서 고통받던 정치범들이 온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진정 해방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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