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탐구한 예술가, 공간을 유영하는 관객…미술관은 살아있다

설치미술의 거장, 필립 파레노 국내 첫 개인전 '보이스'

리움 통째로 '미완의 실험실'
'AI 타워'가 수집한 외부세계 데이터
미술관 내부 '청각적 풍경'으로 전달
배두나 목소리 입힌 캐릭터 눈길

난해한 예술? 감상의 틀 깨라
관객은 단순 관찰자 아닌
五感을 경험하는 참여자
"마음껏 떠돌며 노는 게
이 공간을 즐기는 방법"
필립 파레노의 2022년 작품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리움미술관 제공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입구 야외 데크. 11년간 자리를 지켰던 애니시 커푸어의 은빛 대형 설치 작품이 철거된 자리에 커다란 타워 하나가 놓였다. 높이 14m에 달하는 거대한 타워는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지켜보듯 위아래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미술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소음과 목소리가 귀를 휘감는다. 천장에 달린 피아노는 제멋대로 소리를 내고, 물고기 모양의 풍선이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전시라고? 현대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뭘 말하려는 거야.”
지난달 28일부터 리움미술관을 ‘파격적 실험실’로 만든 주인공은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현대미술가 필립 파레노(사진)다. 그가 매료된 건 ‘시간’을 매체로 한 실험 예술. 그는 그렇게 ‘시간 예술의 선구자’가 됐다. 그의 세계를 조망하는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를 위해 파레노와 리움은 2년 전부터 실험실 구상을 시작했다.

이 전시의 이름은 ‘보이스’다. 리움은 데크, 로비부터 M2, M3,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 등 미술관을 기꺼이 털어 파레노의 실험 무대로 내줬다. 개관 이후 한 작가만을 위해 모든 전시장을 내준 건 파레노가 처음이다. 1986년 그의 초기 작품부터 올해 내놓은 최신작까지 40여 점을 전시했다.

○배두나 목소리로 AI가 만든 언어 ‘델타 에이’

미술관을 찾은 이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야외 타워는 그의 신작 ‘막(膜)’이다. 단순 설치작이 아니다. 그가 심은 ‘인공두뇌’다. 42개의 센서를 내장한 인공지능을 심어 미술관 주변의 습도, 소리, 기온 등 데이터를 수집하고 미술관 내부 컴퓨터로 전송한다. 전시장 안에 놓인 모든 작품은 이 인공두뇌가 전달한 데이터가 만든 신호로만 소리를 내고 움직인다.

전시 전반에 목소리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 천장에 설치된 15대의 대형 스피커가 끊임없이 돌아가며 말을 걸어온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 언어는 야외 인공두뇌가 모아 온 데이터로 만들어 낸 가상의 언어다. 파레노는 이 언어에 ‘델타 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옹알이와 언어 그사이 어딘가의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진짜 사람’의 음성과 인공지능을 결합했다. 지난해 4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배우 배두나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2층 전시장에서는 ‘안리’라는 이름을 가진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배두나의 음성으로 델타 에이 언어를 떠든다. 관객은 작품을 보고 있지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작품이 미완성…관람객이 완성하는 미술

파레노는 자신의 실험실 안에서 미술관의 기본적인 역할을 깨부순다. 광활한 전시장 안에 풍선 물고기가 떠다니게 했다. 이곳에서 관객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물고기와 같이 어항에 갇힌 존재가 된다. 파레노가 의도한 ‘주객전도’다. 관람객이 다음 전시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눈앞의 풍선 물고기를 발로 차거나 밀어버려야만 한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작품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작품 감상의 기본 상식마저 깨진다.

미술관 안에 매일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눈사람도 만날 수 있다. 관객은 단 하루도 ‘똑같은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제빙기로 매일 눈을 제조해 녹아 없어진 눈사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은 훼손돼 변하고, 다시 똑같은 것을 만든다고 해도 어제의 그것과 완벽히 같을 수 없다. 그는 “미술관은 비싼 작품을 그대로 지키는 통제된 환경”이라며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파레노가 이번 리움을 무대로 내놓은 작품엔 ‘완성작’이 단 한 점도 없다. 작가와 관객, 주변의 환경 데이터가 하나로 합체돼 상호작용하고, 이로 인해 작품이 소리를 내고 움직이며 완성된다. 그래서 파레노는 “관객이 없는 미술관 속 내 작품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작품은 사람과 환경을 만나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비로소 생명이 피어난다는 얘기다.

○“이해 자체를 포기하라”

위에서부터 1. 필립 파레노의 설치작품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 2002. 2. 피에르 위그, 안리:유령이 아닌 그저 껍데기,2000. 3. 차양연작, 2016-2023.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파레노의 예술 실험은 난해하다. 도대체 떠다니는 물고기와 델타 에이로 거는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려고 하면 골머리를 앓을 수 있다. 관람객들은 그저 전시장 안을 부유할 뿐이다. 파레노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왜 우리는 작가의 작품과 그 의도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전시엔 쉽게 보는 법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파레노가 ‘답안지’ 자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펼친 예술 세계를 보여주고, 관객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펼친 무대와 같다. 공간이 주는 사운드를 향해 눈을 돌리기도 하고, 들리는 소음에 돌아보기도 하며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경험만으로 충분하다.

미술관을 찾는 대부분 관객에게 ‘전시 감상’의 틀을 깨부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드넓은 리움미술관 안에 단 한 점의 그림과 조각 작품도 없는 데다 그 의미를 알 법한 작품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일 여지가 많다는 것을 오감으로 알려주는 전시다.파레노는 “나는 관객에게 감상 순서나 보는 방법을 설명할 마음이 없다”며 “그러니 관객들도 원하는 만큼 전시장을 떠돌고 놀다가 가면 된다. 그게 몇 달간 존재하는 내 세상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실험 세계를 경험할 기회는 오는 7월 7일까지 열려 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