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인공지능 시대 와도 '물질' 없으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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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세계몇 년 전 세상의 화두는 ‘무형자산’이었다. 모두가 소프트웨어, 아이디어, 디자인, 브랜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에 집중했다. 구글, 메타, 넷플릭스,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 세상을 거머쥔 기업들이 증시를 호령했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라는 책까지 나왔다.
에드 콘웨이 지음 / 이종인 옮김
인플루엔셜 / 584쪽|2만9800원
영국 경제전문기자의 물질 탐구
모래 없인 반도체 못 만들고
소금사막 차지하려 혈투도
"물질 세계 벗어나 산다는 건
인간들의 위험한 허상일 뿐"
지금 세상의 관심은 다시 ‘물질’에 쏠린다. 시작은 코로나19였다.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물건들의 공급이 끊기며 우리가 아직 ‘물질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됐다. 최근 인공지능(AI) 열풍도 그런 예다.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는 아마존, 구글, 메타 등을 제치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비싼 기업이 됐다.
○코로나19로 물질 중요성 주목
<물질의 세계>는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 등 여섯 가지 물질을 통해 바로 그런 세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책은 인류 역사에 물질이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물질 세계로부터 독립하기는커녕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강조한다.저자 에드 콘웨이는 영국 언론인이다. 24시간 뉴스 채널 스카이뉴스에서 경제전문기자로 일한다. TV 방송용으로 취재한 내용이 이 책의 바탕이 됐다. 물질의 중요성을 전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도 돌아보지만, 오지의 광산부터 최첨단 반도체 공장까지 세계 곳곳의 현장을 둘러보는 게 이 책의 묘미다.중국은 실리콘 강국이다. 세계 태양광 폴리실리콘 시장 점유율이 90%에 육박한다. 하지만 반도체 소재인 최고급 실리콘 웨이퍼는 아직 못 만들고 있다. 실리콘의 순도를 높이지 못하는 기술 문제가 있지만, 모래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일본 신에쓰 같은 웨이퍼 제조사는 실리콘 기둥(잉곳)을 얇게 썰어 웨이퍼를 만드는데, 그전에 우선 초순수 실리콘을 녹여야 한다. 이 초순수 실리콘을 만들 수 있는 석영암은 현재 세계에서 딱 한 군데서만 얻을 수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루리지산맥의 급경사면에 자리잡은 스프루스파인 마을에 있는 광산이다. 기밀 유지에 극도로 신경 쓰는 벨기에 회사 시벨코가 운영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장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 외부 업체에서 출입할 때는 정비할 기계가 있는 곳까지 안내에 따라 두 눈을 가린 채 걷습니다. 마치 뮤지컬 영화 ‘윌리 웡카’의 한 장면 같죠.” 이 분야 베테랑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참 무서운 일이죠. 만약 누군가가 농약을 가득 싣고 스프루스파인 광산에 살포한다면 6개월 이내에 전 세계 반도체와 태양광 패널의 생산이 끝장날 겁니다.”
○소금호수 차지하려 5년간 전쟁 벌이기도
저자의 발길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소금 호수로 향한다. 우유니 소금 호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100여 년 전 칠레, 페루, 볼리비아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소금의 일종인 질산칼륨 때문이었다.이 물질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바위와 벽돌에서 톡 쏘는 맛의 하얀 소금을 채취해 불을 붙였고 엄청난 폭발력을 목격했다. 중국인들은 이 소금을 ‘불의 약’, 즉 화약이라고 불렀다.
칠레가 차지한 아타카마 소금 호수는 온 세상 식량과 무기 생산의 토대가 됐다. 1차 세계대전 때 참호 위로 쏟아져 내린 연합국 포탄들이 모두 칠레 질산염으로 만들어졌다. 칠레 질산염이 없던 독일은 어떻게 했을까. 1913년께 과학자를 동원해 인공 합성에 성공했다. 저자는 “만약 하버-보슈 공정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1차 세계대전은 훨씬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후 급락했던 아타카마 사막의 위상은 최근 재부상하고 있다. 2차전지의 원료이자 ‘백색 황금’이라 불리는 리튬의 주요 산지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인간이 물질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허상”이라고 말한다. 선진국만 보면 자원을 덜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산업을 후진국에 아웃소싱하기에 생겨난 착시라는 설명이다. 기후 변화나 친환경에 대한 낙관적 전망도 근거가 약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