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서 만난 근대의 모습

일제 감정기 문화가 남아있는 역사 문화 도시
나주곰탕과 사라다빵 먹으러 오는 관광객도 즐비
전남 나주 노안성당
전남 나주에는 근대 문화 흔적이 남아있는 건축물이 곳곳에 있다. 그 중 대표가 바로 '노안성당'이다. 노안면에 위치한 노안성당은 나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회로 우리나라 대표적 근대 건축물이다. 붉은색 벽돌로 마감한 외관에 아스팔트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의 성당 입구는 돌을 쌓아 만들어 3면에 아치를 두었고 그 위로는 종탑이 올려져 있다. 마치 유럽의 작은 성당을 연상케 하는 성당은 주변의 고요하고 소박한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926년에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여 1908년 프랑스의 카다르신부가 지은 일자형 벽제 사제관은 1927년에 동·서방향으로 증축, 라틴십자형 평면이 되었고 정면의 탑신부 1층은 화강석으로 표면을 거칠게 마감하였다. 지금까지 원형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직도 이곳에서 미사를 진행한다. 2002년 9월 13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택을 개조한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한 잔 하는 여유도 나주만의 자랑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3917 마중'은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전남 나주 3917마중
언뜻 예쁜 카페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근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숙박도 가능하다. 1만3223㎡의 너른 공간에는 한복과 근대 복장을 대여해 사진을 기록할 수도 있으며, 이곳에서 매일 직접 만든 디저트는 배 차, 배 양갱, 배 한과 등 나주의 배를 다양하게 활용해 여러모로 나주를 기념하기에 더없이 좋다.

실제로 숙박과 카페가 이루어지는 마중의 목서원은 1939년에 지어진 건물로 나주향교에서 봉기한 나주 을미의 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어머니를위해 건축한 집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대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어 직접 공간을 이용하며 보는 재미가 사뭇 좋다.
→ 전남 나주시 향교길 42-16
전남 나주 나빌레라문화센터
나주 나빌레라 문화센터 옆 '나주잠업역사관'도 들러보면 좋다. 누에를 치던 이곳은 전남 최대의 잠사 공장인 ‘나주잠사’ 터였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비단으로 유명하던 나주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나주잠사주식회사를 이곳에 세우고 조선인들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군수산업의 원료로 이용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문화센터로 건물을 리모델링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센터 옆에 있는 작은 나주잠업역사관은 과거 주식회사의 사택을 살려 우리나라 잠업 역사에 대한 사료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중이다.
→ 전남 나주시 나주천1길 93
전남 나주 구 나주경찰서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조적식 구조 2층 건물이 옛 나주경찰서 건물도 나주의 근현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1982년까지 나주경찰서로 사용하다가 경찰서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2002년 11월까지 소방서 건물로 이용했다. 현재 나주시 농민회, 나주시 여성농민회, 나주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사무실로 쓰고 있다.과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운동가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고, 건물 내에 유치장 같은 시설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직접 방문해보니 그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빨간 외벽과 가파른 목재 계단, 낮은 천장이 세월과 흔적을 대변해줄 뿐이었다. 이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에도 이용하고 있기에 그 의의가 있다.
→ 전남 나주시 남고문로 65
전남 나주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 나주역사
죽림동에 위치한 나주역사는 1913년 7월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만들어진 역이다. 옛날에는 광주·목포·장성 등 다양한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로 대합실이 북적거렸겠지만 2001년 작은 규모로 새마을호가 멈추지 못하고 무궁화호만 이 길을 다니게 되면서 2001년을 기점으로 폐역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주역사는 초창 당시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승차권이나 모습이 실물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어 과거를 그리기에는 좋다.

더불어 이 역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1929년 10월에 일어난 나주학생독립운동이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경 이곳에서 나주 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광주로 퍼져 훗날 전국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엄청난 사건을 기리기 위해 역사 마당 광장에는 기념탑이 있으며, 역사 옆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있어, 당시 나주의 시대상과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열망을 보여준다.
→ 전남 나주시 죽림길 26,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남 나주 영산포등대
영산포등대는 191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 등대이자 강변 등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산포등대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무려 48km 영산강 뱃길을 타고 수산물과 곡물을 실은 선박들을 안내했다.

이후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암·강진·장흥·해남·완도 등 여러 지역과 나주가 연결되어 영산포 지역 상권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작은 등대가 그간 얼마나 오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과 배를 마주했을지를 생각하니 잠시 아득해졌다.
→ 전남 나주시 영산동 659-11
전남 나주 일본인지주가옥
일제강점기 나주 지역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가 살던 집, 일본인 지주가옥도 나주에서 근대 건축물 탐방 때 빠지지 않는다. 1905년 영산포에 도착한 구로즈미는 1909년 영산포에서 제일 큰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가마니주식회사 사장, 다시수리조합장, 전남중앙영농자조합장 등 다양한 업종에서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저택은 1935년경에 청기와와 모든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간 봐왔던 모든 건물 가운데 마당에 꾸며진 돌이며 지붕 하나하나에 일본 색채가 강하다. 광복 후에는 선교사가 고아원으로 운영하였고, 1981년 개인이 매입해 주택으로 사용하다가 2009년 나주시가 매입해 보존하고 있다.
→ 전남 나주시 영산동 66-1


나주의 맛, 곰탕 한 그릇은 꼭 먹고 가야

전남 나주 하얀집
나주 먹거리는 역시 곰탕만 한 게 없다. 3대 나주곰탕 중 하나로 꼽히는 ‘하얀집’은 4대가 이어온 식당으로 무려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나주곰탕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나주에 들어선 ’다케나타 통조림공장’에서 유래한다. 당시 공장에서 작업하고 남은 소머리와 부산물이 시장에 유통됐고, 부산물에 살코기를 손질해 넣고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작이다. 이후 사태와 목심, 양지를 넣고 끓이는 것으로 발전했고, 비로소 오늘날의 맑고 개운한 국물 나주곰탕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하얀집은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의 국물을 몇 차례 토렴해 손님상에 내놓는다. 그 위에 노릇한 계란 지단과 송송 썬 대파 그리고 같이 상에 올라오는 묵은 김치와 깍두기, 껍데기 수육까지 한 상에 올라온 모든 것이 일품이다.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6-1
전남 나주 행운분식
곰탕 한 그릇 한 뒤에 디저트를 찾는 이들이 향하는 가게다. 곰탕거리에 위치한 이 가게는 떡볶이나 순대를 파는 분식집이 아닌 빵집이다. 이미 ‘사라다 빵’으로 전국의 입소문을 탄 덕에 이른 아침에도 가게는 분주하다. 가장 유명한 사라다빵과 소시지가 첨가된 소시지빵, 크로켓, 팥 도넛, 꽈배기까지 종류는 꽤 다양하나 가격은 모두 2000원 안팎이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 구입한 빵은 포장만 가능하나 팬데믹 여파로 길에서조차 갓 나온 따끈한 빵을 맛볼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바삭함은 사라진 사라다 빵을 맛보았지만 뭉근한 시큼함과 달달함이 어우러진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남 나주시 나주로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