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아르떼필, 국제무대 첫 출격… ‘홍콩 아트 페스티벌’ 대장정 막 올라

‘홍콩 아트 페스티벌’ 초청 공연
10~12일 마티네 콘서트 열어

프로코피예프 ‘피터와 늑대’서
악상의 변화 생생하게 드러내
높은 집중력, 풍부한 양감 돋보여

홍콩 작곡가 도밍 람 ‘벌레 세상’
신비로운 색채와 중국풍 선율 인상적
매년 3월만 되면 전 세계 예술가들과 문화계 주요 인사들이 앞다퉈 찾는 도시가 있다. ‘동양의 불야성(不夜城)’이라 불리는 도시 홍콩이다. 이 기간만큼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연장이자 갤러리로 변신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연예술 축제인 ‘홍콩 아트 페스티벌’,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 등 저명한 문화 행사 일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올해 52회를 맞은 ‘홍콩 아트 페스티벌’은 현지 참관 열기가 뜨거운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10만 장의 티켓 중 절반 이상이 사전 예약으로 팔려나갈 정도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달 ‘홍콩 아트 페스티벌’에서 초청 연주를 한다는 소식에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이 반색한 이유다. 한경아르떼필 창단 이후 첫 국제무대 출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한경아르떼필은 10~12일 ‘마티네 콘서트(주간(晝間) 음악회)’, 12일 ‘한경아르떼필 단독 공연(피아니스트 손민수 협연)’, 15~17일 ‘라 스칼라 발레 공연(르 코르세르)’을 연다. 발레를 제외한 모든 공연의 지휘봉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최연소 수석 부지휘자를 지낸 뒤 홍콩 구스타프 말러 오케스트라 예술감독과 한경아르떼필 수석 객원지휘자를 겸하는 홍콩 지휘자 윌슨 응(35)이 잡는다.
지난 10일 침사추이 홍콩문화센터 콘서트홀. 공연장은 연주 한 시간 전부터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주말 마티네 콘서트인 만큼 가족 단위 관객이 많았는데, 공연 포스터 앞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려는 부모들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로비 곳곳에 수십미터의 긴 줄이 생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연의 첫 곡은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어린이를 위해 쓴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였다. 소년 피터가 오리를 잡아먹은 늑대를 잡기까지 벌어지는 모험담을 그린 관현악곡이다. 이 작품에선 작품 속 캐릭터들이 특정 악기로 표현되는데, 윌슨 응은 주선율을 내는 악기군을 명료하게 짚어내면서 악상의 변화를 더없이 생생하게 들려줬다.

현악의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음색과 선명하게 뻗어나가는 플루트와 오보에 선율, 호른의 깊은 울림은 시종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풍부한 양감을 발산했다. 윌슨 응은 셈여림의 변화를 세밀하게 조형하면서 악단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특히 목가적 악상과 강렬한 악상을 오가는 구간에선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분위기 전환을 이뤄내면서 연주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날 객석은 아이들이 많았던 만큼 다소 소란스럽기도 했는데, 오케스트라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극적인 효과와 세부 표현이 선명히 조형된 연주는 프로코피예프의 동심을 살려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음 곡은 ‘홍콩 현대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 도밍 람이 쓴 관현악곡 ‘벌레 세상’. ‘꿀을 만드는 벌들’, ‘개울가의 잠자리’, ‘명주를 뽑아내는 누에들’, ‘꽃들 사이의 나비’ 등 네 개 섹션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체들의 조화와 화합에 대한 작곡가의 영감을 담고 있다. 윌슨 응과 한경아르떼필은 첫 소절부터 신비로운 작품의 분위기를 명징하게 드러냈다.자칫 지저분하게 들릴 수 있는 현의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되풀이하는 연주), 글리산도(두 음 사이를 빠르게 미끄러지듯 연주)는 그 무엇보다 정교하게 표현하면서 곤충 날갯짓 특유의 생동감을 살려냈다. 마라카스, 슬레이벨, 버드콜 등 독특한 음향의 타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풍부한 색채, 이따금 들려오는 중국풍 선율 또한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로는 덴마크 작곡가 닐센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중 ‘수평아리의 춤’을 들려줬다. 현악과 목관의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과 금관의 리듬은 견고했고,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는 명료했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수평아리처럼,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악단의 에너지는 신선하면서도 생명력 넘쳤다. 악단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할 만한 무대였다.
홍콩=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