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상, 이변은 없었다…7개 오스카 품은 ‘오펜하이머의 날’
입력
수정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변은 없었다. 올해 오스카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독무대였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무관의 설움을 씻어내고 감독상을 거머쥐는 등 7관왕을 차지했다.
‘오펜하이머’ 7관왕…작품·남우주연상 등 휩쓸어
실화 기반의 미국적 영웅서사, 아카데미 홀려
크리스토퍼 놀런 첫 감독상
“아카데미 여정에 함께해 감사”
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 수상 불발
미야자키 하야오 등 日영화 선전
1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펜하이머는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남우주연·남우조연·편집·음악·촬영감독상을 받았다. 총 23개 수상 부문 중 주요 트로피를 싹쓸이하며 지난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이어 2년 연속 7관왕 기록을 일궜다.
13개 부문서 7개 ‘싹쓸이’…오펜하이머, 오스카 코드 통했다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다. 당초 영화계에선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오펜하이머가 2004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이후 20년째 미답인 11관왕 고지에 오를 수 있을지가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이날 초반 여우조연·각색상을 연달아 놓치고, 미술·분장·의상상도 ‘가여운 것들’에 내주며 고전했지만, 후반 주요상을 휩쓰는 저력을 보였다. 복잡한 플롯,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구성, 물리학을 시각화하는 방식 등 수준 높은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 등 영화의 특성이 아카데미 코드에 들어맞았다. 봉준호 감독이 "로컬어워드"라는 뼈 있는 농담을 던졌던 것처럼, 아카데미는 미국·백인 위주의 보수적이고, 정치성 강한 시상식으로 유명하다. 이를 의식한 듯 최근 여성(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3), 아시아(기생충·2019), 성소수자(문라이트·2017) 등에 문호를 개방했지만, 복잡한 국제정세가 얽히고설킨 올해는 미국적 영웅서사를 가진 오펜하이머를 지나칠 수 없었다.특히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다룬 영화를 사랑하는 아카데미의 성향이 전에 없던 전기(傳記)물인 오펜하이머에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10년 이후 작품상 수상작만 봐도 ‘아르고’(2013), ‘스포트라이트’(2016) 등 실화를 기반한 영화들이 작품상을 받았다. 올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플라워 킬링 문’도 실화 바탕이지만 미국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투영됐단 점에서 오펜하이머에 미치지 못했단 평가다.
놀런의 화려한 대관식…주연상은 킬리언 머피·엠마 스톤
올해 눈길을 끄는 지점은 단연 크리스토퍼 놀런의 감독상 수상이다. 놀런은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등을 연출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유독 오스카상과 인연이 없었다. 2018년 ‘덩케르크’로 수상 기대를 모았으나 불발됐다.놀런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1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놀라운 여정을 함께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우주연상은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가 받았다. 천재성을 가진 과학자의 인간적 고뇌를 스크린에 담아냈단 평가를 받은 그는 "지난 20년 통틀어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루이스 스트로스 역할을 맡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이언맨’으로도 받지 못한 오스카를 처음 수상한 그는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내가 이 역할을 원했다”고 했다.엠마 스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로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벌써 네 번째 연기 호흡을 맞추며 란티모스의 ‘뮤즈’로 자리매김한 그는 란티모스 감독에게 “벨라 벡스터(극 중 배역)로 살게 해 줘 감사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패스트 라이브즈’ 고배…日영화 반짝 선전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작품상과 각본상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쉽게도 ‘오펜하이머’와 ‘추락의 해부’에 밀려 수상이 불발됐다. 앞서 이 영화는 2020년 ‘기생충’과 2021년 ‘미나리’에 이은 한국인(계) 감독의 영화로 수상 기대감을 모았다.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남녀가 세월이 지나 미국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로, 미국에서도 장기 흥행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큰 인기를 끌며 ‘바벤하이머’로 불렸던 ‘바비’는 빌리 아일리시와 피니어스 오코넬 남매가 작사·작곡을 한 노래로 주제가상을 받는 데 그쳤다. 영화 음악의 거장 존 윌리엄스(92)는 ‘인디아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로 아카데미상 역대 최다인 54번째 후보에 지명됐지만, ‘오펜하이머’ 음악 감독인 루드비히 고란손에 가로막혔다.일본 영화는 적잖은 성과를 냈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고질라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시각효과상을 받았다.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은 “할리우드 멀리서 일하다 오스카 무대를 섰다"면서 "우리가 상을 탄 건 모두에게 기회가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