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1853년 美 '흑선'과 K웨이브

류시훈 유통산업부장
“흑선(黑船)도 섞여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됐다.” 월간지 ‘일본 국제상업’은 지난해 일본 화장품 제조업계를 분석한 특집기사를 이렇게 맺었다. 흑선에 비유된 기업은 글로벌 1위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 코스맥스. 중국에서 존재감을 보여준 코스맥스가 일본에 생산기지를 건설한다고 발표한 데 대해 현지 업계의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흑선은 1853년과 1854년 매슈 페리 제독의 미국 동인도함대가 도쿄만(灣)에 진입해 통상·수교를 압박할 때 타고 온 함선을 일컫는다. 선체에 타르가 칠해져 있어 그렇게 불렸다. 한국판 ‘흑선’ 코스맥스가 내년 말 이바라키현에 공장을 완공하면, K뷰티 글로벌화의 한 축인 인디 브랜드들로선 일본 시장 공략을 위한 제품을 생산해줄 모함(母艦)을 현지에 두는 효과를 얻게 된다.

日 공략 선봉에 선 K뷰티

한·일 양국 소비재 기업의 상호 진출이 확산일로다. 1년 전 정부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안 발표를 계기로 이뤄진 양국 관계 개선이 기폭제가 됐다.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이후 나타난 격렬한 반감이나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옛일처럼 느껴진다. 특히 양국 간 여행객 급증은 자연스럽게 상대국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일본에서의 K웨이브가 예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돼 주목된다. 올해 들어선 하루가 멀다고 우리 기업의 일본 공략 소식이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K뷰티는 일본에서 황금기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빠른 신제품 출시, 뛰어난 품질, 합리적 가격을 앞세운 K뷰티의 일본 내 위상은 급상승하고 있다. 프랑스를 제치고 2년 연속 수입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수입액은 2022년보다 23.8% 늘어난 959억4000만엔(약 8515억원)에 달했다.

패션·푸드 기업의 기세도 거침이 없다. 최근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기업 팝업스토어엔 어김없이 현지 인플루언서가 몰리고, 소비자의 긴 줄이 생긴다.

또 다른 내수시장으로 봐야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마뗑킴은 오사카 쇼핑 명소인 한큐백화점 우메다본점에 문을 연 팝업스토어에서만 10억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굴지의 일본 종합상사들로부터는 협력하자는 ‘러브콜’도 받았다고 한다. 토종 버거·치킨 브랜드로, 점포 수 기준 국내 1위인 맘스터치는 다음달 도쿄 시부야에 첫 직영점을 내고 연 7조원이나 되는 일본 버거 시장에 도전한다. 버거의 상징인 맥도날드가 지난 39년간 운영하던 곳을 꿰차고 매장을 연다니 놀라운 일이다.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일본의 이케아’로 불리는 니토리가 홈플러스에 잇달아 매장을 열었고, 블랙 라테로 유명한 후쿠오카 노커피는 압구정동에 곧 정식 매장을 선보인다.

내수시장 규모가 약 3000조원으로 한국의 세 배나 되는 일본이 K웨이브를 흑선에까지 비유하며 경계하는 것은 엄살일 수도 있다.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일본 제조·유통사가 장악한 시장을 뚫고 들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일본 시장을 두드리기 더 좋은 환경이었을 때가 있었나 싶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면밀한 시장 조사와 마케팅 전략으로 살려내야 한다. 일본을 더 이상 해외가 아니라 내수시장으로 보고, 과감하게 현해탄을 건너는 시도가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