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돌봄 노동, 이주 여성…소외받은 삶이 모여 '합창'이 된다
입력
수정
조영주 개인전 '카덴짜', 송은서 개최클래식 공연장을 찾은 팬들이 가장 환호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여러 포인트가 있을 테지만, 독주자의 화려한 애드리브를 기대하는 청중도 적지 않다.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 연주자가 즉흥적인 기교로 선보이는 '카덴차'에 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퍼포먼스 미디어아트'를 추구해온 조영주 작가의 카덴차는 이런 면에서 독특하다. 그의 영상 작업은 화려하지 않다. 실력 있는 연주자 혼자만을 부각하는 '독주(獨奏)'도 아니다. 조영주의 작품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 이민자 등 사회에서 자주 소외된 이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몸짓은 관객한테 전율을 선사하기 충분하다.서울 청담동 송은에서 열리고 있는 조영주 개인전 '카덴짜'는 그의 작품 세계를 만날 기회다. 작가는 작업 초기인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소수자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미디어로 구현해왔다. 이번 전시에선 '여성 노동'을 중심으로 10점의 영상과 설치작품,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지난 2020년 제20회 송은미술대상 수상을 계기로 열린 전시다.
퍼포먼스, 영상, 이원 생중계 등 실험으로
여성과 돌봄 노동, 이민자 문제 다뤄
작가의 퍼포먼스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신체'다. 작업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고요한 동시에 치열하다. 퍼포머들이 서로의 몸을 조이고 마찰하는 화면에 거친 숨소리로 구성된 배경음악을 결합한다. "인간의 몸은 이들이 살아간 사회문화적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듯 말이죠."비디오 설치작품 '이산 신체 해후'(2024)는 그중 여성들의 근현대사를 다룬다. 4명의 연극배우가 각자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간 여성을 연기한다. 1960년대 파독 간호사부터 유학 1세대, Z세대(1995~2010년 출생)까지 다양하다. 차가운 톤으로 구성된 화면에 삽입된 불협화음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연출한다. 서로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이들의 삶은 나란히 걸린 화면에 이원 생중계되며 맞닿는다.구성과 내용 면에서 작가가 2년 전 선보인 '이산 신체 재회'(2022)와 비슷하다. 5명의 퍼포머가 이산가족 상봉과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역사적 사건 속 여성을 연기한 영상이다. 작가는 "1980년대 이산가족 상봉 방송에서 한 할머니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며 "미디어가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조명해온 과정을 돌아보고 싶었다"고 했다.작가가 2016년 경험한 출산도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다. 전시장 바닥에 카펫처럼 깔린 '풀타임-더블'(2024)이 이를 보여준다. 출산 당시 인천의 한 레지던시에서 작업하던 그는 베이비시터와 육아일지를 통해 소통했다. 아이의 배변과 수면, 수유 등을 기호화해 표기했다. 일종의 악보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 작품엔 시작과 끝 지점이 명확하지 않다. 그의 육아가 끝없이 이어지는 '풀 타임' 노동임을 암시하는 걸까.
조영주는 아동과 노인, 장애인에 대한 '돌봄'의 문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전시장 2층의 설치작품 '휴먼가르텐'(2021~2024)이 대표적이다. 가정과 어린이집, 요양원 등에서 주로 사용되는 스펀지 재질의 매트와 운동기구가 배치됐다. 작가는 "돌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로의 신체에 접촉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서로의 유대 관계를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가의 관심사는 최근 이주 여성의 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솔리스트들'(2024)은 대부분 이주여성으로 구성된 동대문구가족센터 행복메아리 합창단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합창단원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전부 단원들의 이름으로 구성됐다.
아마추어 합창단인 만큼, 작품의 본질은 합창의 완성도가 아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이주 여성들의 투박한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전한다. 화면 속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독주자'면서, 동시에 서로의 목소리에 소리를 더하는 합창단으로서 공존한다.
전시는 무료지만, 사전 예약은 필수다. 4월 14일까지.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