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帝는 건재했다…'칸타빌레의 정수' 보여준 안네 소피 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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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리사이틀안네 소피(실제 발음은 ‘조피’에 더 가깝지만 통상적인 표기를 따른다) 무터는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남녀를 불문하고 단연 가장 원로급이다. 여기서 언급하기조차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녀는 14세인 1977년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오케스트라 데뷔 무대를 치른 이후로 환갑인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바이올린의 여제’로 칭송받았다. 지난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에서 무터는 자신이 왜 그렇게 불렸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분간은 누구에게도 제위를 선양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일 만큼 훌륭한 공연이었다.
세월의 흐름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무터 역시 첫 곡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18번 사장조’ 맨 첫머리에서 음정이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두 번째 순서인 슈베르트의 ‘환상곡 다장조’에서 피치카토(현을 손으로 뜯어서 소리 내는 주법)를 좀 둔하게 연주하는 등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깊이 있는 해석은 이런 사소한 결함을 덮고도 남았다. 무터는 모차르트에서 유연하면서도 섬세하고 조화로운 연주를 들려주었고, 슈베르트에서는 ‘칸타빌레(노래하듯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2부 순서의 첫 곡은 클라라 슈만(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의 ‘세 개의 로망스’였다. 곡의 낭만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 어찌 들으면 상당히 관조적인 연주였는데, 이 점이 역설적으로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듯한 원숙함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 순서는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는데, 무터는 이 곡에서 (슈베르트의 ‘환상곡’ 맨 마지막 대목을 제외하면) 앞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강렬함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결단력 있고 단호한 마무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25년이 넘도록 무터의 반주자로 활동한 람베르트 오르키스 역시 모범적일 만큼 단정하게 연주했던 이전 곡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과감하고 역동적인 반주로 무터를 뒷받침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번 공연 프로그램 구성은 고전주의 음악(모차르트)으로 시작해서 20세기(레스피기)로 나아가게 구성돼 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무터가 무려 네 곡(!)이나 연주한 앙코르에서 두 곡을 존 윌리엄스의 작품으로 구성한 것은 무척 일관성 있는 행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앙코르 ‘곁에 있어 좋아’(Nice to be around)는 영화 <신데렐라 리버티>에 나왔던 음악으로 재즈풍인 반면, 네 번째로 연주한 <쉰들러 리스트> 주제곡은 특유의 비가풍 선율을 깊은 감성으로 애절하게 연주해 대조를 이뤘다. 한편 첫 번째와 세 번째 앙코르는 각각 브람스 ‘헝가리 춤곡’ 가운데 ‘1번’과 ‘2번’으로, 여기서 무터는 템포와 표현을 극단적으로 설정해 그야말로 앙코르다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1번’ 마지막의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는 한때 그녀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던 화려함을 새삼 돌이켜보게 했다.
또 한 가지 앙코르에서 주목할 만했던 점은 청중과 다양하게 소통하려는 시도였다. 무터는 매번 앙코르에 앞서 오르키스와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기도 하고 자신이 세운 ‘안네 소피 무터 재단’에서 세계 각국의 젊은 연주자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한국인(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도 있다거나, 존 윌리엄스에게 생강 쿠키를 선물로 보내고 답신을 받을 일화 등을 소개하면서 많은 청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여제’라는 진부한 수사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오만함 따위는 그림자도 없었다. 이 또한 그녀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황진규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