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열린사회와 그 적들
입력
수정
지면A34
총선 앞 '비민주적' 위성정당의부패는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퇴폐는 무엇이 나쁜지도 모른 채 그것이 일상화된 현상을 말한다. 총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이 퇴폐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정당을 통해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한다. 선거권을 행사해 선출된 국가기관과 그의 결정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헌법 제8조 제2항은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여야의 반칙행위는 일상이 돼버렸다.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취지와 달리 거대 양당의 기득권만 강화하며 괴물로 탄생한 위성정당이 대표적이다.
친북인사 공천 등 '파행' 잇따라
유권자 의견 반영되지 못하고
소수의 권한 남용 부각돼
'의사결정의 위기' 방치 안 돼
민주주의·법치 지킬 제도 갖춰야
김종민 S&L파트너스 변호사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추진 중인 범야권 군소정당 비례대표 후보 공천은 충격적이다. 당선 안정권이라는 비례대표 20번 안에 진보당 3명, 새진보연합 3명, 시민사회 4명 등 총 10명의 후보를 배치하기로 했지만 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후신이다. 민주당이 “사실상 ‘통진당 부활’의 길을 터줬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4명의 비례대표 국민후보를 선출한 연합정치시민회의의 심사위원단 36명도 공동위원장인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를 비롯해 친북좌파단체 인사들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비례대표제는 모든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가 대의기관 구성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선거 절차가 정당의 주도하에 이뤄지고 후보자 선정과 그 순위 결정을 정당의 지도부가 독점함에 따라 유권자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이번 더불어민주연합의 공천 과정에서는 이런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됐다. 민주주의의 운명은 그 제도가 여전히 유효한지에 달려 있다. 여론의 비판으로 뒤늦게 2명의 후보가 사퇴했지만 편향된 밀실공천이 결코 ‘국민후보’로 포장될 수는 없다. 민주적 제도를 이용한 권한 남용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는 점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귀도 루지에로는 민주주의의 사악함은 다수의 승리가 아니라 ‘저질적인 것의 승리’라고 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종국에는 다수의 횡포와 질적 저하라는 또 하나의 독재 형태를 낳게 될 것을 우려했다.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 중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이끄는 조국혁신당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잡하다. 울산시장 불법선거 개입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황운하 의원을 비롯해 각종 범죄와 비리 행위로 유죄 선고나 징계를 받은 검찰·경찰 출신들이 총집합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역 비례대표 의원 8명을 제명한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비례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에 의원 꿔주기를 목적으로 공직선거법상 의원직이 상실되는 탈당 대신 아무런 징계 사유가 없는데도 ‘제명’ 처분의 꼼수를 쓴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의 불안정성과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수면 밑에 잠복해 있을 때는 잘 알기 어려운 문제도 표면화되면 해결할 수 있고 진정한 개혁을 시작할 발판이 된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남긴 교훈은 민주주의가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통스럽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우리의 선택은 명확하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도전받지 않고, 선출된 정치권력이 함부로 국정농단을 하지 못하도록 국가의 시스템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리스어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위기는 기회를 만들고 아포리아는 인간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분별력을 낳는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미래는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이고 용기 있는 자들에게는 기회”라고 했다. 부당한 특혜와 냉소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무는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가장 큰 위협은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 그리고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역사적 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