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그이와 결혼 못하면 죽어버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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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아모레클래식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길고 어려워서 듣기가 부담스럽다는 것, 다른 하나는 듣는 건 좋은데 알아야 할 게 많아 엄두가 안 난다는 점이다. 대안은 있다. 오페라 아리아와 만나보는 일이다. 교향곡, 협주곡 중심의 기악곡과 깃털처럼 가볍기만 한 가요와 팝 중간에 바로 아리아가 자리한다.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아리아
아름다운 곡조에 통속적인 가사 '눈길'
쉬운 클래식, 지친 영혼에 큰 위로 전해
아리아는 클래식이되 일단 짧다는 미덕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 ‘빨리빨리’의 민족 아니던가. 한국인의 성정과 잘 맞는다. 아리아에는 무엇보다 가사가 있다. 서사와 내러티브의 시대에 부합한다. 사랑, 욕망, 그리움, 미움, 운명, 배신, 화해 등이 그 안에 다 있다.물론 아리아라고 다 쉽진 않다. 우선 언어 장벽.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말의 난장이다. 하나도 못 알아듣는 외국말로 노래하는데 감동은커녕 난감하기 일쑤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노래를 통해 언어와 친숙해질 수 있는 찬스다. 막강한 영어가 기를 못 펴는 분야가 바로 오페라다. 멋지지 않나. 아리아와 접하다 보면 의외의 안도감(?)이 생기기도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곡조가 사실은 아주 통속적이기 짝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아, 이런 거였어? 클래식도 별것 아니군. 오히려 인간적인데?”
푸치니(1858~1924) 작곡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오페라 ‘잔니 스키키’는 잘 몰라도 이 노래만큼은 너무나 유명하다. 딸의 결혼과 행복을 위해 죽은 사람인 척 유언을 바꿔치기하는 지략가 아버지, 잔니 스키키 얘기다.
“우리 아빠, 엄지 척! 아빠, 그이가 너무 좋아요. ‘포르타 로사’에 가서 반지를 사야지. 그이와 결혼 못하면 저는 베키오 다리로 가서 아르노 강에 몸을 던질 거예요. 아빠, 제 부탁 들어줄 거죠?”이게 가사다. 멜로디와 가사의 부조화 맞다! 그래서 실망스럽나? 외려 빙그레 미소 짓게 되지 않나? 보석 거리 포르타 로사, 베키오 다리, 아르노 강. 모두 피렌체의 명소다. 다비드 상(像), 우피치 미술관 등이 우뚝하지만 사실 피렌체는 16세기에 최초의 오페라가 태동한 곳이다. “르네상스라는 나무의 맨 마지막 가지에 피어난 꽃”이 오페라고, 그 발상지가 바로 꽃의 도시 피렌체다.
‘전망 좋은 방’(1985)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제작한 영국 영화다. 국내에선 1989년 개봉했다. 런던에 약혼남을 두고 이모와 함께 피렌체 여행에 나선 루시. 우연히 만난 몽상가 청년 조지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둘은 다시금 전망 좋은 방이 있던 피렌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음악감독 리처드 로빈스는 영리하게도 푸치니의 이 아리아를 영화 전편에 깔며 분위기를 살렸다. 목숨만큼 사랑하는 남자와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아빠를 채근하던 오페라 속 라우레타와 영화 내내 귀여움을 발산하는 루시가 그대로 겹친다. 수준 있는 예술영화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반드시 극의 맥락과 관련이 있다. 그걸 알아채는 기쁨은 한사코 포기할 수 없는 지적 유희다.
나는 ‘전망 좋은 방’을 본 1980년대를 소환한다. 서울 강남 도산공원 맞은편 씨네하우스였다. 당시 유일한 예술영화 상영관. 종합상사에서 늘 몸이 파김치였던 나는 일 덜하고 월급은 준수하다고(?) 믿었던 방송국에 들어갔다. 알량한 내 머릿속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TV에서 잘 빗은 머리에 양복 입고 앉아 또박또박 뉴스 몇 분 하다 사라지는 것. 이거다 싶어 택했건만 웬걸, 라디오의 존재를 간과했다. 4교대 근무에 숙직 들어오면 채널이 하도 많아 하루에 뉴스를 7~8개 했다.“슬기로운 생활의 벗, 여러분의 KBS가 잠시 후 자정을 알려드립니다. 중파 711KHz, FM 97.3MHz, KBS 제1라디오입니다. HLKA.”
밤 12시 콜사인을 마쳐야 비로소 평온한 하루가 끝났다. 아나운서 5년 차 초여름에 만났던 ‘전망 좋은 방’과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지친 영혼에 커다란 위로였다. 지금도 그렇다. 뉴질랜드가 낳은 아름다운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사진)의 연주가 돋보인다.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