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택시에서 듣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늦은 밤 만난 클래식 '덕후' 기사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경험 선사

이은아 음악칼럼니스트
직업상 택시를 자주 타는 관계로 택시 이용 경험에 관한 꽤 많은 데이터가 쌓였다. 그중 거의 틀림없는 공식이랄 게 있다면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택시를 탔는데 작은 볼륨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조용하고 쾌적한 운행 경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클래식 FM으로 라디오 채널이 맞춰져 있다면 기대해도 좋다.

클래식 음악 덕후에 걸맞게 기억에 남는 택시 탑승 기록 역시 클래식 음악과 관련 있다.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도저히 집에 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택시를 탔다. 택시 내부는 아주 깨끗했고 기사분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간단한 행선지 확인과 함께 출발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택시 안에서 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덕후답게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광활하고 장대한 오케스트라 멜로디에 바이올린이 존재감을 증폭해 멋짐이 폭발하며 1악장이 끝났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보통의 라디오라면 전 악장이 나오지 않고 1악장에서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놀랍게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클라리넷과 오보에의 몽환적인 연주로 2악장이 시작됐고 이윽고 바이올린의 매력적인 저음이 따뜻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3악장이 막 시작될 무렵 목적지에 도착해 운임을 치르고 하차해야 했다. 그때 그간 별다른 말이 없던 기사분께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손님, 오늘 음악이 마음에 드셨나요?”라고 여쭤보셨다. 수많은 ‘택시 인생’에서 기사님께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잠깐의 머뭇거림에 기사님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양성식이라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였습니다”라며 “오늘 다 못 들으신 곡은 나중에 제가 또 손님으로 모셔서 들으실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라고 덧붙이고 미소를 지었다.

냉정한 덕후의 마음을 온돌처럼 따뜻하게 데워준 이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암스테르담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가 당시의 음악감독이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함께 세계 연주 여행을 하는 여정이 담긴 다큐멘터리 ‘50번의 콘서트’다. 악단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웨토 등을 돌며 콘서트와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영화는 한 단원이 택시에서 만난 기사를 비춘다. 그는 승객으로 만난 로열콘세르트헤바우 단원에게 “길 위에서 존엄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저는 거친 길 위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듣습니다”라고 말한다. 단원은 감동해 눈물을 글썽인다.

이 영화 속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사님의 마음과 양성식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CD 플레이어에 넣은 서울 기사님의 마음이 어딘지 맞닿아 있을 것으로 막연히 짐작해본다. 그러나 그 두 분은 몰랐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 택시 기사분을 만난 로열콘세트르헤바우 단원에게도, 서울의 음산한 밤에 걸어갈 힘조차 없어 택시를 잡아탄 나에게도 기억 속 가장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순간을 그분들이 길 위에서 직접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두 분의 기사님이 우주 어딘가에서 만나 ‘클밍아웃’을 하며 덕력 넘치는 대화를 하는 장면을 가끔 상상해 본다. 아쉽게도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담긴 음반은 현재 구매하기 어려운 듯하다. 또 ‘50번의 콘서트’ 영화도 다시 볼 방법이 요원하다. 다음에 다시 그 기사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 음반의 구입처를 여쭤보고 싶다. 그리고 ‘50번의 콘서트’ 영화도 추천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