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야 한다.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안똔 체홉의 '세 자매' 리뷰
안똔 체홉의 ‘세 자매’는 그의 다른 작품들인 ‘벚꽃동산’, ‘갈매기’, ‘바냐 삼촌’ 과 함께 4대 장막극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극작가가 체홉이다. 그러나 어릴 때는 체홉 작품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작품에는 영웅이 등장하지도 않고, 극적인 긴장감이 넘치는 것도 아니며 권선징악의 후련함 같은 것도 없다. 대신 그 곳에는 우리 이웃의 모습,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연극 '세 자매'
제정 러시아 말기, 육군 장성 아버지를 여의고 남겨진 가족이 있다. 한량으로 도박에 빠진 아들 안드레이. 그리고 세 자매. 미혼이자 학교 교사인 첫째 딸 올가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지만 달리 살 방도가 없어 그만두지 못하고 고달픈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일찍 결혼한 둘째 마샤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유부남 베르쉬닌 중령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막내 이리나는 사회에 나가 일할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술에 쩔어 사는 군의관, 그 도시에 주둔해 있는 선량한 군인들, 이리나를 사랑하는 뚜젠바흐, 얄미운 올케 나따샤 등. 체홉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캐릭터가 없다. 각기 개성이 강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는 동안 나는 안드레이가 되기도 하고, 베르쉬닌 중령에 공감하기도 하며 살료느이 대위와 결투를 앞둔 뚜젠바흐에 빙의되기도 한다.
연극 '세 자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1900년. 연극을 보며 ‘120년이 지났어도 인간은 참으로 변한 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기심, 따뜻함, 무책임, 동정심, 분노, 열망, 사랑, 무기력 등의 모든 감정들은 어제와 오늘 우리가 느끼고 드러내는 그대로이다. 어느 방송국에서 당장 이 작품을 현재를 배경으로 각색해 드라마로 내보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것이다.

세 자매는 유년시기를 보냈던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이다. 교사를 하기 싫어했던 올가는 결국 교장까지 되고, 마샤는 새로 부임해온 베르쉬닌 중령과 사랑에 빠졌는데 곧 군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리나는 벅찬 마음으로 노동을 동경해왔으나 막상 일을 시작하자 극심한 피로와 환멸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사연이 본격적으로 꼬이게 되는 3막부터 왜 눈물이 났을까? 아마도 그 궁상맞고 지리멸렬한 일상에서도 그들이 놓지 않는 한 줄기 선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늘 자살소동을 벌이는 아내 때문에 마음 편할 날 없는 베르쉬닌 중령은 마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삼백 년만 지나고 보면 이런 문제는 없겠죠? 그래요, 미래는 분명히 멋진 생활이 되어 있을 겁니다! 멋진 생활 말입니다! 아, 정말 앞으로 얼마나 훌륭한 생활이 될까요? 물론 우리가 그 생활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그 새로운 생활을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고, 일하고 혹은 괴로워하며, 요컨대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셈이어서 바로 이 일에 우리의 생존의 목적이 있고, 우리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후손의 몫입니다. 나는 행복을 못 누리더라도 하다못해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에 가서라도 누리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백 년을 뛰어넘어 객석에 앉아 있는 나는 알고 있다. 미래에도 멋진 생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오히려 당신의 후손들은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베르쉬닌의 그 대사 때문에 나는 갑자기 이 인류 전체가 안쓰럽기도 하고, 동시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에 기대는 베르쉬닌과 저들의 모습이 애처롭도록 아름다워 눈물을 떨군 것이다.

장교복을 벗고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후줄근해진 뚜젠바흐가 이리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여전히 애틋하고 순정하여 아름답다. 그는 베르쉬닌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날아다니게 될 것이고 양복 모양도 달라지겠죠. 멀리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현재대로일 겁니다. 천 년이 지나봤자 인간은 역시 ”아아, 산다는 것은 괴롭다!”고 탄식하겠지만 동시에 또한 꼭 지금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 싫다고 생각하겠지요.” 이 정도면 체홉은 미래를 내다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맞다. 우리의 생활은 1900년 안드레이와 세 자매가 지지고 볶는 저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지리멸렬하고 삶은 신산스러우며 때로는 비루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지속된다. 아니, 지속되어야 한다. 집을 저당 잡히고, 결혼을 앞둔 약혼자가 세상을 떠났어도, 세상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삼백 년 후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베르쉬닌의 저 낙관이 대책 없이 보일지언정 그 순한 마음, 선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다.
안똔 체홉 흉상
안똔체홉극장의 작품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세련된 연출과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덕분에 3시간의 공연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특히 권태와 욕망 사이에서 위태롭고, 우울하면서도 사랑에 들뜬 마샤를 연기한 서송희 배우가 돋보였다.

체홉과 함께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사는 끝을 맺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늘도 대한민국 서울 명륜동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극장들에서 공연되고 있다.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무대에서 살아갈 올가, 마샤, 이리나에게 언제나 한결같은 응원을 보낸다.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