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이크로 장작 패다가 '극강 엔딩' 치닫는 '에코 스릴러'
입력
수정
영화 리뷰장작이 쩍. 하고 갈라진다. 그 다음 장작을 향하는 도끼 뒤로 섬찟할 정도로 무성한 숲과 사냥꾼의 총알을 피해 다니는 사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공생하는 인간들이 있다. 도시와 문명에서 한참 떨어진 듯한 숲 속 부락(?)에서 전개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굳이 장르적 레이블을 붙인다면 ‘에코 스릴러’다. 관계와 기억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일상적인 화두를 성찰을 담은 메타포와 대사로 그려내는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 하마구치는 자연과 인간, 문명과 자연의 그 위대하고도 위험천만한 인연에 대해 역설한다.영화의 이야기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작은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에 사는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는소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일상을 채워 나간다. 특별한 직업도, 수입원도 없어 보이지만 타쿠미의 생활은 자연이 주는 부산물로 풍족하기만 하다. 온 이웃이 가족처럼 지내는 이 동화 같은 마을의 평화는 어느 날 숲 한 가운데에 글램핑장을 짓겠다는 한 기업의 설명회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유하던 타쿠미와 하나, 그리고 마을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들의 장대한 계획은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하마구치의 전작들처럼 엄청나게 지난하고 긴 롱테이크들은 이번 작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역시 중추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캐릭터들의 행위와 서로의 소통이 대부분 롱테이크를 통해 기록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마구치의 전매 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롱테이크는 그렇기에 양가적이다.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전개를 지연시킴으로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을 하나의 긴 컷에 가둬둠으로써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영화적 공간을 관찰하고 탐미할 수 있게 한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이번 영화의 ‘롱테이크’는 어쩌면 필연·필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에 담겨진 숲의 절경,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반짝이는 시냇물, 눈 덮인 땅의 이 곳 저 곳을 뚫고 올라오는 식재료들. 인간은 이 자연 안에서 가장 흉물스럽고, 위험한 존재다. 적어도 타쿠미와 하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하고 살아간다.영화의 중반 정도에 일어나는 글램핑 사업설명회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을 분명 궁금해질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사건이 있긴 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물론 또 다른 롱테이크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묵살된다. 또 다시 이어지는 긴 테이크의 장작 패기… 이쯤 되면 이 영화에서 장작이 나올 때 마다 경기를 할 지경이 된다. 설명회를 진행했던 두 직원은 어떻게든 마을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업을 실현시키고자 타쿠미의 단조로운 일상에 합류한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사건’이 터진다. 영화의 말미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은 아마도 하마구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 아닐까 생각된다. 글램핑장이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공간에서 자연과 인간, 문명과 자연은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인간은 속절 없이 참패한다. 이 글에서 영화의 결말을 언급하지 못하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결말은 앞서 등장했던 지난한 롱테이크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전반 80% 정도의 러닝타임을 정당화 시키고도 남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엔딩이다. 하마구치는 이 결말, 즉 인간의 참패를 경고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번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세계 4대 영화제를 모두 쟁취한, 동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화려한 수상목록과 전세계 평론가들의 극찬과는 별개로, 특히 이번 작품으로 감독은 또 다른 차원의 영화적 세계를 탐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의 차원이자, 자연의 차원을 수행하는 하마구치의 순례다. 과연 이 시대를 선두하는 창작자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일본 거장으로 거듭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전매특허급 엄청나게 긴 '롱테이크'로 전반부
'장작 패기' 반복되다 마지막 장면 폭발적
등 전작으로
아카데미·베를린·베니스·칸 4대 국제영화제 섭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