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이크로 장작 패다가 '극강 엔딩' 치닫는 '에코 스릴러'

영화 리뷰

일본 거장으로 거듭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전매특허급 엄청나게 긴 '롱테이크'로 전반부
'장작 패기' 반복되다 마지막 장면 폭발적

등 전작으로
아카데미·베를린·베니스·칸 4대 국제영화제 섭렵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작이 쩍. 하고 갈라진다. 그 다음 장작을 향하는 도끼 뒤로 섬찟할 정도로 무성한 숲과 사냥꾼의 총알을 피해 다니는 사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공생하는 인간들이 있다. 도시와 문명에서 한참 떨어진 듯한 숲 속 부락(?)에서 전개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굳이 장르적 레이블을 붙인다면 ‘에코 스릴러’다. 관계와 기억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일상적인 화두를 성찰을 담은 메타포와 대사로 그려내는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 하마구치는 자연과 인간, 문명과 자연의 그 위대하고도 위험천만한 인연에 대해 역설한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이야기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작은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에 사는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는소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일상을 채워 나간다. 특별한 직업도, 수입원도 없어 보이지만 타쿠미의 생활은 자연이 주는 부산물로 풍족하기만 하다. 온 이웃이 가족처럼 지내는 이 동화 같은 마을의 평화는 어느 날 숲 한 가운데에 글램핑장을 짓겠다는 한 기업의 설명회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유하던 타쿠미와 하나, 그리고 마을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들의 장대한 계획은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의 전작들처럼 엄청나게 지난하고 긴 롱테이크들은 이번 작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역시 중추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캐릭터들의 행위와 서로의 소통이 대부분 롱테이크를 통해 기록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마구치의 전매 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롱테이크는 그렇기에 양가적이다.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전개를 지연시킴으로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을 하나의 긴 컷에 가둬둠으로써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영화적 공간을 관찰하고 탐미할 수 있게 한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이번 영화의 ‘롱테이크’는 어쩌면 필연·필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에 담겨진 숲의 절경,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반짝이는 시냇물, 눈 덮인 땅의 이 곳 저 곳을 뚫고 올라오는 식재료들. 인간은 이 자연 안에서 가장 흉물스럽고, 위험한 존재다. 적어도 타쿠미와 하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하고 살아간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 정도에 일어나는 글램핑 사업설명회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을 분명 궁금해질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사건이 있긴 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물론 또 다른 롱테이크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묵살된다. 또 다시 이어지는 긴 테이크의 장작 패기… 이쯤 되면 이 영화에서 장작이 나올 때 마다 경기를 할 지경이 된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회를 진행했던 두 직원은 어떻게든 마을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업을 실현시키고자 타쿠미의 단조로운 일상에 합류한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사건’이 터진다. 영화의 말미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은 아마도 하마구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 아닐까 생각된다. 글램핑장이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공간에서 자연과 인간, 문명과 자연은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인간은 속절 없이 참패한다. 이 글에서 영화의 결말을 언급하지 못하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결말은 앞서 등장했던 지난한 롱테이크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전반 80% 정도의 러닝타임을 정당화 시키고도 남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엔딩이다. 하마구치는 이 결말, 즉 인간의 참패를 경고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번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세계 4대 영화제를 모두 쟁취한, 동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화려한 수상목록과 전세계 평론가들의 극찬과는 별개로, 특히 이번 작품으로 감독은 또 다른 차원의 영화적 세계를 탐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의 차원이자, 자연의 차원을 수행하는 하마구치의 순례다. 과연 이 시대를 선두하는 창작자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