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편 연극, 대사 외운 적 없다는 '대학로 장승'
입력
수정
지면A29
'아트' 주연 박호산배우 박호산(52)의 별명은 ‘대학로의 장승’이다. 대학로에서 오랜 역사를 쌓은 배우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 싹을 틔워 영화로, 드라마로, 훨씬 넓어진 연기 스펙트럼에서 활동하지만 그는 늘 대학로로 다시 돌아온다. 300편에 가까운 연극을 했지만 그는 “해본 역할보다 하고 싶은 역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연우무대 데뷔 후 300편 출연
"대사 대신 맥락을 기억한다"
영화 TV 넘나들지만 늘 연극으로
"죽을 때까지 무대 서고 싶다"
최근 거액의 그림을 둘러싼 세 남자의 우정을 다룬 연극 ‘아트’로 무대에 선 그를 만났다. 박호산은 이 작품에서 우유부단한 문구 영업사원 이반을 연기한다. 장장 3개월간의 대장정이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유난히 대사가 길고 많다. 목이 쉴 정도로 연습에 몰입하고 있는 그를 서울 혜화동 연우무대 앞에서 만났다.▷영화와 TV에서 활약하다가 대학로로 돌아오는 기분은 어떤가. ‘장승’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웃음)기분 좋으면서도 징글징글하다. 이제 데뷔한 지 28년 됐는데 대학로는 내게 연극 ‘우리 읍내’ 속 읍내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도 대학로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다. 터전이자 집 같은 존재다.”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언제였나.“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기국서 연출의 ‘햄릿 4’라는 공연을 봤다. 아버지가 지물포를 하셨는데 손님 중 한 명이 연극 티켓을 아버지에게 줬다. 표를 손에 쥐고 성내역에서 혜화역까지 긴 여정을 거쳐 소극장이라는 곳에 처음 왔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본 연극에서 주연 배우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를 굉장히 캐주얼한 말투로 연기했고, 그 대목에서 완전히 매료됐다.”
▷연우무대가 첫 직장이었는데.
“어릴 때 본 가장 좋았던 연극이 모두 연우무대의 연극이었다. 뭔가 달랐다. 특히 ‘한씨 연대기’ ‘칠수와 만수’ ‘최선생’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같은 창작극은 대학로의 흐름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수많은 공연을 했지만 가장 재미있고 즐겼던 공연이 있는지.
“가장 하기 힘들었던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 ‘왕의 남자’의 기반이 된 연극 ‘이’가 그랬다. 공길 역할로 시작했고 이후 나이가 들어서 연산군 역할을 했다. 공길 역을 할 땐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딜레마를 마주한 때였다. 인생의 기로에서 모든 것이 힘들 때 만난 캐릭터여서 그랬나, 괴로운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쟁취(?)해서 완주한 공연이었고, 많은 선배에게 연기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영화, 드라마, 연극을 초월하는 배우다. 가장 큰 쾌감은 어디에 있는가.“단연코 연극이다. 연극이 일어나는 극장, 그 공간을 매우 좋아한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의 집중력, 그 밀도가 느껴져서다. 그 밀도를 내가 지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내가 관객의 공기를 (즉석에서) 바꿀 수 있다는 건 정말 연극만의 매력이다.”
▷최민식 배우의 마지막 연극이 2007년이다. 그때 본인 표현으로 “똥줄이 탔다”는 표현을 하더라.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대사를 외운다기보다 맥락을 익힌다. 그래서 대사를 외우는 일이 부담된 적은 솔직히 없다. 연습 기간에 맥락을 완전히 익혀 놓으면 대사를 잊어버려도 어떻게든 비슷한 표현으로 채워 낼 수가 있다. 언제까지라고 하면 정말 죽을 때까지다. 살아 있는 한, 공연을 하고 싶다.”
▷연극 ‘아트’는 어떤 작품인가.
“‘아트’는 이미 10년 가까이 무대에 오른 공연이다. 오래전 정보석 선배 버전으로 이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블랙 코미디고, 궁극적으로는 (한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세 친구의 우정, 혹은 역학관계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이번에 맡은 ‘이반’ 역할은 셋 중 가장 웃음을 많이 자아내는 캐릭터다.”
▷아직도 못 해본 역할이 있나.“매우 많다. 사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젊지 않다’는 이유로 안 됐다. 이젠 베르테르가 지닌 ‘절실함’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 탐험하고 싶은 역이 훨씬 더 많다.
김효정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