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오른팔 잃은 피아니스트…다섯 손가락은 열 손가락보다 강하다

[3분 클래식]
장에플랑 바부제/국립심포니 제공
지난 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이날의 협연자는 '라벨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장에플랑 바부제(62).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우아하게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양손이 아니다. 왼쪽 손만 건반 위를 질주했다.

그는 이날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20여 분간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와 오직 다섯 손가락으로 대적한 바부제는 빼어난 음색과 옥구슬 같은 소리, 정확하고 절제된 연주로 감동을 자아냈다.

바부제가 선보인 이 곡은 특별한 사연으로 유명하다. 라벨이 전쟁으로 오른쪽 팔을 잃은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1887~1961)을 위해 1930년 작곡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당대 출중한 피아니스트였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명한 부잣집이자 명문가였다. 가족들 또한 빼어난 지식인이자 문화예술에 정통한 인물들이었는데, 그의 동생은 유명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음악적 재능까지 타고난 비트겐슈타인,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은 이 장래유망한 피아니스트의 성공적 미래를 앗아간 듯 했다. 한쪽 팔만 남은 채 집에 돌아온 그를 위해 동료 작곡가들은 잇따라 왼손을 위한 레퍼토리를 작곡했다. 라벨 외에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에리히 볼프강 코른콜트, 폴 힌데미트 등이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피아노 협주곡 외에 자주 연주되는 왼손용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 라벨이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할 당시 선배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의 작품을 연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생상스 역시 손을 부상당한 절친이자 피아니스트 카롤린 드세르(1843~1913)를 위해 '왼손을 위한 6개의 연습곡'을 작곡한 바 있다. 그는 바로크 시대 거장으로 유명한 프랑수와 쿠프랭과 장 필립 라모의 작품을 참고해 6개의 소품 모음집을 구성했다. 프랑스 음악가 '라모-생상스-라벨'의 계보가 왼손 레퍼토리에서도 이어진 셈.

이외에는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작품이 유명하다. 그가 1894년 작곡한 '왼손을 위한 전주곡과 녹턴'은 피아노 독주곡으로 스크리아빈 특유의 멜랑콜리한 선율과 신비로운 화성감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꼽힌다. 이 곡 또한 스크리아빈이 지나친 연습으로 오른손에 부상을 입게되면서 만든 곡이다.이처럼 왼손용 레퍼토리는 오른손을 쓸 수 없거나 오른손이 불편한 연주자들을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하려는 음악가들의 열정과 이들을 위하려는 작곡가들의 우정 덕분에 후대의 왼팔 피아니스틀에게 보석같은 레퍼토리가 만들어진 것.

라벨과 스크리아빈의 곡 모두 눈을 감고 들으면 양손으로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음으로 베이스 라인을 만들고, 고음 영역에서 멜로디를 이어가며 마치 양손과 같은 효과를 낸다. 당연히 난이도는 극히 높을 수 밖에 없어 '왼손을 위한 난곡(難曲)'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온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는 "다섯 손가락으로 열 손가락의 효과를 내야하는 만큼 소리를 컨트롤이 쉽지않고, 기술적 어려움 또한 뒤따른다"고 말했다.
Leon Fleisher in 1963
후대 왼손 피아니스트들도 등장했다. 미국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1928~2020)가 대표적.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1952년)하며 천재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연주자로서 전성기인 34세 때부터 원인 불명의 오른손 마비 증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플라이셔는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고, 왼손 레퍼토리 개발에 주력하며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인고의 시간을 거친 그는 결국 40년 뒤 오른손을 치료해 양손으로 연주한 음반을 발표했다.일본 출생의 피아니스트 타테노 이즈미(88)는 2002년 1월 콘서트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은 그는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손으로 연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그를 위해 수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썼다. '타테노 이즈미의 왼손'이라는 곡에는 왼손을 위한 100여 곡이 수록돼 있다. 그는 "양손이 있었다면 이렇게 섬세하게 연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이훈 (c)툴뮤직
국내에서는 왼팔 피아니스트 이훈 씨(52)가 지난해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왼손 레퍼토리들을 연주한 바 있다. 그는 미국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 과정을 이어가던 중 뇌졸중으로 한쪽이 오른쪽 반신 마비와 언어 장애를 얻게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시내티 음대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 7번의 연주회를 마치면 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는 수년의 노력 끝에 2017년 학위를 얻게 됐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