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윤석남·김길후… 시대를 넘어서 한 자리에 각자 서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백남준 윤석남 김길후 3인전 '함'
4월 20일까지
백남준의 'W3'(1994).
백남준(1932~2006)이 미래를 내다본 대단한 예술가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에도 ‘미디어아트의 창시자이자 인터넷의 개념을 예견한 거장’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이유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젊은 세대는 특히 더 그렇다. 백남준이 예견했던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자유로운 순환’이라는 개념이 이제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됐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예지가 너무 정확하고 빠르게 실현된 탓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의 생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공감하기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을 직접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규모가 워낙 큰 데다 구형 전자제품을 사용한 탓에 전시하기도, 유지·보수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나 경기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 같은 대규모 전문 전시장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백남준의 대작, 윤석남의 존재감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3인전 ‘함’은 모처럼 서울 시내에서 백남준의 대표적인 대작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전시장에서 가장 크고 좋은 공간은 전부 백남준의 1994년작 ‘W3’이 차지하고 있다. W3은 월드 와이드 웹(WWW)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동일한 영상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상영해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고속으로 흘러가는 광경을 형상화했다. 이진명 학고재갤러리 이사는 “전기를 워낙 많이 쓰는 작품이라 갤러리 전기 관련 설비를 증설했다”며 웃었다.
백남준의 '인터넷 드웰러'(1994).
TV 등을 통해 익살스러운 얼굴의 모습을 만들어낸 ‘인터넷 드웰러: mpbdcg.ten.sspv’ 역시 인터넷 세상을 내다본 작품이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인터넷이 실제 세계만큼 생생하고 감각적이며 친근할 것이라는 예측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구-일렉트로닉 포인트’(1990) 역시 백남준의 중요한 작품으로, 백남준이 냉전 종식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개최를 축하하며 만든 원형의 작품이다. 이 모든 작품들은 해외 유수의 미술관들에서 숱하게 전시된 이력이 있다.

백남준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함께 참여한 전시 작가인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85)의 작품도 만만찮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윤석남이 선보인 조각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8)는 작가를 대표하는 연작 중 하나다. 나무를 깎아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먹으로 그려 유기견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작가는 “신문에서 유기견 1025마리를 보살피는 이애신 할머니의 사연을 보고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개를 유기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매정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강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윤석남의 작품 전시 전경.

자유분방한 김길후 드로잉 돋보여

이번 전시의 또다른 주인공은 화가 김길후(63)다. 전시장을 통틀어 그의 작품 수가 가장 많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기로 이름난 중견 작가다. 1999년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다며 자신이 그린 작품 1만6000여 점을 불태우고, 2013년에는 이름을 김동기에서 김길후로 개명한 일은 미술계에 잘 알려져 있다.
김길후의 '사유의 손'(2010).
변화무쌍한 그의 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학고재 신관 지하 2층에 있는 드로잉 작품들. 마치 아이가 그린 것 같지만 ‘막 그린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을 보다 보면 ‘자유분방’이라는 단어의 뜻을 직접 체감할 수 있다. 작품을 둘러보던 윤석남 작가도 “이 드로잉들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러운 마음마저 든다”고 했다.
김길후의 '꿈 같은 삶의 기록'(2024).
3인전이지만 갤러리 공간의 한계, 백남준 작품의 거대한 규모 때문에 세 작가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느낌은 희미하다. 하지만 백남준과 윤석남, 김길후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각각의 매력을 뿜어낸다. 백남준의 작품 하나만으로도 들러볼 만하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