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치매가 예술이 될 때…'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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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展
셰릴 온지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치매 걸린 모친의 일상 카메라에 담아
더 케어테이커&이반 실 협업 작품
노년의 기억 왜곡 시청각적으로 형상화
두렵고 감추기만 해야 할 일일까. 예술은 치매와 기억의 불완전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20일 개막한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삶의 황혼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소녀 같은 엄마' 촬영한 셰릴 온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기억을 안고 살아가듯,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해석을 선보인다. 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이반 실, 시오타 치하루, 정연두, 민예은 등이 출품했다.작가의 모친은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았다. 미국 뉴햄프셔 농장에서 수십년간 함께한 모녀의 추억도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는 듯했다. 상실감에 빠진 작가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머니를 비추는 나른한 햇살의 아름다움을 마주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아이폰과 대형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의 삶 속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조류 관찰자였던 작가의 모친은 치매에 걸린 뒤에도 말총으로 새 둥지를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온지는 "어머니는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해맑게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곤 하셨다"며 "치매라는 낯선 상황에서도 사진을 매개로 어머니와 새로운 관계를 쌓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낡은 매트리스에는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성장기에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불륜을 목격한 작가는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자랐다.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고통을 떠올리며 6점의 '밀실' 연작을 제작했다. 이번에 전시된 '밀실 1'은 그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에 들여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분의 화음 끝 20분의 소음
영국의 '예술 듀오' 더 케어테이커(제임스 레이렌드 커비)와 이반 실은 이번 전시를 위해 음악과 회화를 컬래버한 작품을 준비했다. 둘은 1990년대 초반 첫 만남 이후 기억과 인지 상실을 공통분모로 협업해온 오랜 친구다. 더 케어테이커 모든 앨범 표지는 이반 실의 그림이기도 하다.100년 살다 간 배롱나무의 생애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층에 설치된 6m 높이 배롱나무다. 100여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모앙새다. 영상이 시작하면 제주의 계절을 따라 매화와 유채, 벚꽃이 피고 진다. 주위에 펼쳐진 갓난아이와 어린이, 노인 등 주민들의 영상을 배경으로 조용히 자신의 순간을 기다린다. 잔뜩 만개한 나무는 담담하게 꽃잎을 떨어뜨리며 다시 겨울을 맞이한다.국내 치매 인구는 100만명에 달하고,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둔 현시점에서,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을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20일까지. 서귀포=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