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위대해" 세계가 주목하는 강서경과 김윤신의 어떤 조우

국제갤러리 강서경x김윤신 전시
강서경, 비단과 실 활용해 부드러운 물성 강조
김윤신, 남미의 단단한 원목을 통한 '기원쌓기'
김윤신 작가가 자신의 나무조각과 함께 서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누구나 간직하는 ‘할머니의 기억’이 있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 소복이 쌓인 밥공기, 마당에서 익어가는 구수한 누룩 냄새…. 인생의 여러 굴곡을 묵묵히 걸어온 할머니들의 굽은 등은 그 자체로 어렴풋한 ‘어떤 시절’을 소환한다.

한국인들만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한국 할머니들의 서사가 지속적으로 환영받고 있어서다. 지난 2019년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강서경 작가의 ‘그랜드마더 타워(Grandmother Tower)’가 설치됐다. 다음 달 열리는 올해 비엔날레엔 88세 원로작가이자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가고 있는 김윤신이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두 작가가 각자 삶의 기억을 표현한 방식은 딴판이다. 강서경은 실크와 실을 활용한 회화로 부드러운 굴곡을, 김윤신은 전기톱으로 원목을 깎아 만든 조각으로 단단하고 강인한 성질을 강조했다. 비슷하면서 다른 이들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조우했다.


"이건 한국의 모든 할머니 이야기"

“병중(病中)이셨던 저의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받은 감동이 작품의 동기가 됐어요. 이건 한국인, 특히 한국의 모든 할머니 이야기죠.”

강서경 작가(46)가 5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그랜드마더 타워’ 연작을 출품하면 했던 말이다.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휘어있는 철사를 색실로 감아 쌓아 올린 조각이다. 민담 속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꼬부랑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비틀거리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했다.▶▶▶(관련 기사) 인생 최정점에 홀연히 사라진 강서경, 암과 싸우며 만든 '꾀꼬리의 세상'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마치(March)'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강서경은 힘겨운 삶에도 굴하지 않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작가의 예술혼과 결부해왔다. 1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3 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인 '정(井)' 연작도 마찬가지다. 가로세로 격자를 비단으로 수놓은 회화에는 하루의 시름을 베틀로 짜내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친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알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 여인은 그 시절을 살아간 모든 할머니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1977년생인 강서경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영국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현재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 리움미술관,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 등 굵직한 무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베네치아·상하이·리버풀 비엔날레 등 국제 미술전에도 이름을 알렸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마치(March)'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여기까지만 놓고 순탄한 '꽃길'을 밟아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를 계기로 해외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작가는 불현듯 찾아온 출산, 이어 두 차례 암 투병을 겪었다. 작가 인생의 황금기에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지난해 리움미술관 대규모 개인전 ‘버들북 꾀꼬리’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생명력이 감도는 3월을 맞아 행군하듯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의미의 '마치(March)'.

대부분 신작 조각과 회화로 꾸려진 이번 전시는 강서경의 주요 개념 ‘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물 정’ 한자처럼 사각으로 구성된 그의 회화는 조선 세종이 창간한 악보 <정간보(井間譜)>의 기호에서 영감을 얻었다. 음표가 모여 선율을 완성하듯, 각 네모 칸을 수놓은 비단이 모여 일종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다채로운 변주도 돋보인다. 네모반듯한 모양부터 한쪽 가장자리가 둥근 형태까지 다양하다.
강서경 작가의 '정井-걸음 #02'(2023~2024) /국제갤러리 제공
모서리의 부드러운 곡선이 두드러지는 ‘정井-걸음 #02’(2023~2024)에는 할머니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투영됐다. 고령으로 인해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은 작가의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걷곤 했다고. 둥근 호의 모양새는 이러한 보행기의 형태이자, 힘겹지만 묵직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던 노인의 모습을 형상화한다.또 다른 연작인 ‘모라’는 음정의 최소 단위인 ‘모라(Mora)’에서 착안했다. 혼자서는 아무 의미를 갖지 않지만, 여러 음정이 섞이는 과정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시간성’에 주목했다. 어느 날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바닥에 깔아둔 투명한 아크릴 판넬에 튄 물감에 주목했다. 이러한 판넬을 모아 겹겹이 쌓으며 작품으로서 이름을 부여했다. 극도로 추상화된 이번 시리즈는 그 자체로 작가의 시간을 함축한 일기다.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기에 최적의 전시다. 지난해 리움 전시를 인상깊게 봤던 관람객이라면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전기톱 든 ‘88세 소녀’ 김윤신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88)은 요즘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다. 지난 1월 국제갤러리·리만머핀과 공동 소속 계약을 맺었다. 노령의 김 작가가 상업갤러리와 인연을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뿐 아니다. 오는 4월 17일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 전시에 생애 처음으로 오른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줄곧 남미를 무대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이주를 결심한 이유는 남미의 울창한 숲에 반해서다. “나무는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무의 질감과 색, 무게, 향을 전부 파악해야 하는 이유죠. 좋은 나무를 찾다 보니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 이르게 됐네요.”

▶▶▶(관련 기사) 전기톱 든 '90세 소녀' 김윤신, 마침내 그를 알아본 세계적 화랑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윤신 개인전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1, K2 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거점을 옮긴 뒤 선보이는 첫 전시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의 주류 미술과 단절된 채 쌓아올린, 작가의 뚝심을 마주할 기회다. 1970년대 ‘기원쌓기’ 시리즈부터 1980년대 이후 ‘합이합일 분이분일’ 등 근작까지 51점이 걸렸다.

1935년 이북 땅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작가의 친오빠는 행방이 묘연했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피난 과정에선 아버지와도 이별했다.

“밤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철부지였던 저는 그 옆에서 주운 돌을 하나씩 쌓으며 빌곤 했죠.”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윤신 개인전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작가는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으며 ‘기원쌓기’ 연작을 내놨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나무 조각을 자르고 쌓은 형태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 옛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던 서낭당 돌무더기 등 전통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질 좋은 원목으로 조각하는 건 꿈 같은 일이었다”며 “무너진 가옥의 서까래 등 폐자재를 어렵게 구해 썼다”고 회상했다.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은 단절과 결합의 끊임없는 순환이다. 작가를 상징하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一 分二分一)’ 시리즈가 단적인 예다. '서로 다른 두 개가 하나 되고, 다시 이들이 각각 나뉜다'는 뜻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조각에는 나무의 거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한데 어우러진다. 과거에 흩어진 가족이 언젠가 다시 모이길 바라는 간절한 '기원'을 암시하는 걸까.

조각들은 한국의 돌쌓기와 남미의 토테미즘이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국의 민간 신앙에 아르헨티나산 아름드리 목재를 결합한 결과다. 물이 없는 건조한 자갈밭에 자라는 알가로보 나무, 겉껍질이 유독 얇은 팔로산토 나무 등이 단골 소재.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윤신 개인전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작가의 예술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는 작은 나무 조각에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을 칠한 ‘회화 조각’에 몰두하고 있다. K2 전시관에 놓인 근작들은 한국의 전통 오방색과 남미의 생동감 넘치는 색감을 오가는 자태를 뽐낸다.

회화 조각엔 작가의 유년기 기억이 반영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단절된 시기, 작가는 또래가 없던 시골에서 홀로 보낸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뒷산 개울에 펼쳐진 나무와 돌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집 울타리 수수깡을 뽑아 색칠하며 놀던 소녀. 백발의 노인이 된 그는 나무판자에 색을 칠하며 수수깡 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여성 조각가이자 프랑스 유학 1세대, 남미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 작가. 그를 수식하는 여러 단어의 공통분모는 '비주류'란 점이다. 이북 땅과 프랑스, 남미를 거치며 어디서나 이방인을 자처했던 그의 삶은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주제인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와도 맞닿아 있다.

"'동서남북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구 전부가 저의 전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작품을 남기는 게 저의 남은 꿈입니다."두 전시 모두 4월 28일까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