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고흐·렘브란트의 천부적 재능을 능가할 수 있을까?

[arte] 심상용의 이토록 까칠한 미술

발상(發想)과 작업(作業)

2014년 인공지능(AI)을 통해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dt)>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1) 실험은 렘브란트 회화의 특성- 붓의 각도, 안료와 색상, 배합비, 명암 등-을 데이터화하고, 머신 러닝을 통해 컴퓨터가 렘브란트 스타일에서 패턴을 추출하고, 결과를 3D 프린터로 재현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어느 것이 천부적(天賦的) 재능의 산물인지, AI의 머신 러닝의 성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인류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적 성과와 1억 4800만 픽셀의 디지털 세포로 된 이미지 사이에 차이는 크지 않아 보였다. 예술을 재정의해야 할 순간이 도래한 것일까? 창의성, 인간의 고유한 자질의 영역이었던 그것은 이제 사전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인가?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는 손사래를 친다. AI 렘브란트의 성과는 ‘아직은’ 회화예술의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으며, 기계 실험을 통해 걸작의 특성을 더 잘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겸양의 미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계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미술이나 사진 공모전에서 AI의 손을 탄 것들이 호평을 받고 수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제이슨 M. 앨런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Theatre D’opera Spatial). 이 작품은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한경DB
이미지 생산의 주체가 인간 예술가인지 AI인지를 따지는 것은 사안의 본질이 아니다. 주의를 집중해서 보아야 할 대상은 AI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 즉 인간의 인식 내부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불길한 균열이다. 인간이 모든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사고자이자 행위자라는 인식에 나기 시작한 균열, 자신의 삶이 제공하는 사고와 감정이 아니라, 예컨대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AI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요청하고 수용하는 태도에서 목격되는 균열이다. 시각 예술가들은 이제 시간을 요하고 수고로운 사유라는 비용을 발생시키는 ‘발상(發想)’의 단계를 겪지 않아도 된다. 대신 ‘좋은(?) 건너뛰기’를 위한 텍스트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AI 작업의 협력의 결과물로서 만들어지는데, 이때 시작 단계의 위임과 작업의 익명성의 문제는 놀랍게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해서 획득된 결과물이 자신의 직접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다. ‘life-to-image’에서 ‘text-to-AI-to-Image’로의 전환, 이렇게 되면 예술은 이미 다른 것으로 재정의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발상(發想)은 창작 과정 전반에 있어 뇌관에 해당한다. 세계 관찰과 자기성찰을 융합하고, 그것에서 살아있고 변화무쌍한 존재와 삶의 실체를 포착하고 정제해내는 내밀한 주의집중 과정이자, 그로부터 표현형식의 구조적 기초가 모색, 준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단계가 AI의 연산에 의한 패턴 포착 기능으로 일거에 대체되더라도 두 작업은 여전히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일까? 큰 변화가 정서적 차원을 넘어 믿음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술가들마저 자신의 발상력보다 AI의 능력을 더 신뢰한다. AI 기술이 진전되면 머지않아 사람들이 인간보다 디지털 도우미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는 게 AI 산업계의 예측이다.

발상 단계에서 파생된 논쟁은 생성된 결과물 단계에서 더 수상쩍다.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 Unsupervised > 같은 디지털 영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라. < Unsupervised >는 2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MoMA의 현대미술 컬렉션 13만여 점을 AI를 통한 해석, 변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디지털 영상이다. 번역과 변환 행위의 결정적인 과정이 AI 의존적이기에 그 누구도, 심지어 기획자인 아나돌 조차도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AI가 어떻게 작업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AI 작업의 결과물이 실망스럽지 않은 것이기를 기대하면서, 제법 장엄해 보이는 눈속임 효과(trompe-l'œil)의 완성도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프롬프트, 즉 AI용 주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다. 누가 < Unsupervised >의 창작자인가? 아나돌이라고 하기에는 최종 결과물에 미치는 AI의 수행 비중이 과도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에게 감흥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2D를 3D로 보이도록 하는 넘실거리는 듯한 눈속임 효과의 극대화고, 그것에서 AI 소프트웨어의 수행의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기계와의 협력이라는 점에서,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키네틱 아트나 디지털 코딩을 사용하는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 미디어 아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가? 하지만, AI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웬만해선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또 다른 지능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예술적 성과물’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떠한가? 타당한 일인가?
(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을 찾은 관람객들이 레픽 아나돌의 ‘비감독(Unsupervised)’(2022)을 감상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색채와 모양이 바뀌는 이 작품은 인공지능(AI)이 모마 소장품 데이터를 수집해 만들었다./ 한국경제신문 정소람 특파원 (우) &lt;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dt)&gt; 프로젝트, 2014/ 한경DB
자율성 침탈과 관련된 우려는 예술창작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빠른 스크롤과 클릭에 갇혀 타인과 사물과의 관계가 줄어들거나 단절되는 것, 엄청나게 많고 투명한 데이터가 생각 자체를 밀어내는 것...

사소한 문제건 중요한 문제건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검색 엔진에 물어보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AI에게 묻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한다. 지혜에 이르지 못해 파편화된 다발로 남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렌즈를 거친 것처럼 보이는 완성형에 가까운 지식을 구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정반대다. 헨리 A. 키신저에 의하면 디지털 세상에서 가장 먼저 고갈되는 자원이 지혜다.2)
“우리 시대의 모순은 디지털화로 ... 정보가 계속 늘어나지만 진중한 사색에 필요한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 자극을 원하는 욕구에 맞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나 경험은 대체로 극적이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이다. 이런 환경에서 진지하게 생각할 공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3)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얼마 남지 않은 공간들 가운데 하나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도 철지난 신화일 뿐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예술가들은 거대한 야수에 쫓기면서, 불안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가상주의자로의 전향을 집요하게 강요받고 있다. ‘물리주의자로 남기를 고집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오로지 혹독하고 외로운 저항만이 남게 될 거라는 위협과 마주한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디지털화되고, AI가 부단히 정부와 상품시장에 주입되면서 사실상 그 영향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4) 물론이다. 어느 정도의 타격은 필연적일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여전히 옹색하지 않을 것이며 광대하기까지 할 것이다.


르브넝(revenant), 다시 돌아온 자(者)

기술이 아니라 사고의 진전이 일어나야 한다. 인간으로서 이제껏 해왔던 일을 지속히면서 사고의 진전을 이루어내야 한다. 비록 이후에 일어난 많은 전쟁과 학살을 막지 못했을지라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이라는 다짐으로 돌아가는 것.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 의하면 인간의 위대성은 그러한 정신에서 도래한다. 형이상학적 위대성은 과거를 스승으로 삼을 때, 기원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절박함을 기억할 때 주어진다. “ ... 이제 막 시작되는 생, 이제 막 피어나는 영혼, 이제 막 열리는 정신의 가르침이 우리에게는 실로 간절하다.”5)

파리 정치대학교의 교수이자 메디치 상과 몽테뉴 상을 수상한 파스칼 브리케네르(Pascal Bruckner)도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한다. 인간을 황혼 속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창조적인 신념, 애써 만들어진 미덕, 많은 가능성 앞에서의 어지어질한 망설임을 내면에서 되살려내야 한다.”6) 잠들었다 다시 깨어나는 것, 부흥(revival)이라는 종교적 현상, 신념과 믿음이 다시 활력을 얻고 새롭게 일어나는 현상이 가능할까? 인간의 시대는 끝나지 않으리라. 또 다른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뿐.
아르떼 편집팀이 챗GPT 에 'AI는 결코 인간의 예술성을 따라올 수 없다'를 입력하여 생성한 이미지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유를 부리며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길게 늘어놓기 보다는 질문을 더 단순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이데거(Heidegger)가 그냥 살기만 하는 존재자와 미래에 기투(企投)하는 실존자를 구분했던 것 같은 단순화.7) 이를 더 요약할 줄 알았던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마치 도래할 AI 시대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정말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채 사는 것이다.”8)

AI가 우리에게 정말로 사는 것 같은 삶의 경험을, 진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할 때의 환희를 제공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작금의 AI 붐이 이 문명의 어깨 위에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이 아닐까 자문해보아야 할 일이다.

1) 마이크로스프트, 네덜란드 델프트 과기대, 렘브란트 미술관 등이 공동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는 큰 인상을 남겨, 2016년 칸느 수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휩쓸었다.
2) 헨리 A. 키신저, 에릭 슈밋, 대니얼 허튼 로커, 『AI 이후의 세계』, 김고명 옮김(파주: 김고명, 2023) pp.89-90.
3) 앞의 책, p.235.
4) 앞의 책, p.230.
5) Gaston Bachelard, La Poétique de la rivière, PUF, 1968, p.114.
6)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이세진 옮김(서울: 인풀르엔셜, 2023) pp.90-91.
7) Heidegger, Qu’est ce que la métaphysique?, Questions I et II, Gallimard, 1938, pp.34-35.
8) Victor Hugo, Les Châtiments, Hachette, 1932,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