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되는 입양아의 삶을 통해 본 인간, 가족, 그리고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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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칼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본다. 그 어디에도 그와 같은 외양을 가진 사람은 없다. 금발머리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무리들 속에 칼은 언제나 유일한 동양인이다. 같은 언어와 음식,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는 늘 이 곳에서 이방인이다.
영화 '조용한 이주'는 덴마크에 사는 한국인 입양아, ‘칼’ (코르넬리우스 클라우센) 과 그의 입양부모를 통해 정체성과 가족의 의미를 찾는다. 열아홉 살 칼은 덴마크의 한적한 시골에서 양부모와 함께 조용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의 양부모는 언젠가 칼이 가족의 젖소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을 잇기를 바란다. 시간이 흐르면서 칼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국이라는 세계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한다. 그러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와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갈등한다. 영화는 실제로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감독, 말레나 최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작년 베를린국제영화제 (2023)의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어 국제영화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감독의 첫 장편은 한국 출신의 두 덴마크 입양인이 서울을 방문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회귀'(The Return)로 그녀는 꾸준히 해외 입양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다. 감독은 이 작품들을 통해 “침묵 되는 입양아의 삶”을 조명하고 “덴마크 백인 가족들 속에 숨은 소수”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자 한다. 무엇보다 '조용한 이주'는 사회적인 아젠다를 넘어 영화적으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인다. 특히 칼의 심리상태와 존재를 환기하거나 은유하는 촬영은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늘 농장 일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듯 하지만 푸른 초장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칼은 한 없이 처연하고, 고독하게 그려진다. 그의 외로움은 장면의 배경과 반대되는 색의 작업복을 입은 모습으로 강조된다. 또한 수 십 마리의 젖소들 사이에서 혼자 작업을 하는 그는 늘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이 공간에서 만큼은) 동물들을 돌보고 구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는 클로즈 업과 롱쇼트를 반복적으로 대조하며 이러한 그의 존재적 역설을 재현한다.
칼의 외로운 일상은 함께 일하는 외국인 동료, 안제이와 가까워지며 변화를 맞이한다. 낙농업을 배우기 위해 가족을 떠나 칼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안제이에게 칼은 동질감을 느낀다. 동시에 칼은 동네에 사는 유일무이한 동양인 소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궁극적으로 칼로 하여금 태어난 곳, 한국에 대한 더 큰 호기심과 그리움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의로도, 타의로도 현재의 덴마크 가족을 떠날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작품들이 입양아의 삶을 조명한 바 있다. 작년에 개봉한 데이빗 추 감독의 '리턴 투 서울'은 입양아인 프레디가 태어난 나라, 한국을 방문해 생부를 찾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고, 저스틴 전 감독의 '푸른 호수'는 미국으로 입양된 안토니오를 통해 입양 정책의 허점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이 주로 캐릭터들의 실제 가족을 찾는 이야기, 혹은 입양으로 인한 정책적·정서적 폐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조용한 이주'는 이전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부모의 입장, 즉 입양아의 부모로 살아가는 가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영화다.
전반적으로 말레나 최의 '조용한 이주'는 주제면에서, 미학적인 면에서 모두 실험적인 시도로 가득한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촬영 뿐 아니라, 영화는 환타지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칼이 상상하는 생모와 한국으로의 여정을 재현한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이러한 환타지 장면들은 80년대 괴기영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올드한 방식으로 보여지지만 덴마크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공간, 그리고 출생지로부터 오랜 거리와 시간을 두고 지낸 칼의 여정과 궁극적으로는 잘 어울리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말레나 최의 영화는 현재도 놀랍지만 앞으로 더 놀라울 것이다. 이방인의 부유 (浮遊)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당위를 추적하는 그녀의 행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