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열풍 뒤에 커지는 경영계 우려…'주주이익 보호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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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주주 권리 강화 움직임에기업들이 ‘주주의 비례적 이익’ 관련 상법 개정 가능성을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정부의 ‘밸류업’ 정책 바람을 타고 일반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에 행동주의 펀드와 개인투자자 모임 등이 상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재계에선 실제로 상법이 개정될 경우 기업의 경영 유연성이 크게 떨어져 중장기적으로 오히려 기업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주주의 비례적 이익' 상법 개정안 논의도 '꿈틀'
"오히려 기업가치 낮춰 주주에 손해" 지적도
'투자자 눈치는 봐야 마땅' vs '어떻게 모든 투자자 입맛을 맞추나'
2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회엔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에 관련한 상법 개정안 두 가지가 발의돼 있다. 기업 이사의 의무를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라고 규정한 현행 상법 제382조의 3 조항 내용을 ‘회사와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용우 의원안)’ 혹은 ‘회사와 총주주(박주민 의원안)’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로 바꾸는 게 골자다. 이들 개정안은 이사가 회사만이 아니라 대주주와 소액주주 등 모든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판단을 내리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게 목표다. 한 행동주의 펀드 운용사 대표는 “상장회사 이사라면 단순히 기업 자체만이 아니라 기업에 투자금을 대준 주주들을 위한 판단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상법 개정안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반영하면 기업들이 좀더 투자자를 배려하게 돼 기업가치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반면 재계는 정반대 시각이다. ‘모든 주주를 위한 결정’이 사실상 현실화할 수 없는 개념이라 기업 경영에 발목만 잡힐 것이란 게 기업들의 중론이다. 매번 경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모든 주주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혜택이 갈 수는 없어서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상장사 투자자들은 최대주주를 제외하더라도 연기금 등 장기투자를 주로 하는 주주, 수 주~수개월간 투자하는 이른바 스윙 투자자, 단타매매를 하는 투자자 등 제각각"이라며 "만일 해외 사업 진출을 위한 투자를 벌인다고 치면 이들의 반응이 서로 천차만별일 텐데 어떻게 모든 주주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상장사 소액주주 대부분은 한 기업의 주식을 2년 이하로 보유하는 단기투자자다.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기업이 장기 성장을 놓칠 수 있다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우려다.
그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 고려가 법적으로 의무화 되면 기업과 이사는 어느 주주로부터든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사법 리스크가 생긴다”며 “그만큼 기업은 소극적인 경영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투자, 구조조정, 합병, 분할 등 시장 상황별로 빠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기업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서로 다른 기업이 엮인 합병 등을 두고는 ‘모든 주주의 만족’에 도달하기가 더욱 어렵다. 합병기업 주주와 피합병기업 주주의 사정이 달라서다.
지분율에 따른 비례적 이익을 어떻게 정의하고, 정량화해 판단할지도 관건이다. 주주의 이익은 배당금을 비롯해 주가 상승분, 의결권 행사 등 비금전적 요소까지 아울러 볼 수 있어서다. 정의가 명확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느 요소에 대해서든 일부 주주가 자신의 지분에 비례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며 무차별 소송을 제기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전망이다. 주주의 이익에 대해선 중소·중견·대기업에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게 산업계의 지적이다. 사업을 유지하려면 이익금을 재투자해야 해 배당금을 늘릴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과 자본여력이 상당한 대기업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원칙상 맞나' 논쟁도 지속
일각에선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 주식회사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상법에 따르면 주주는 투자사에 대해 보유 주식의 값어치만큼만 간접적 책임을 진다. 이른바 주주의 유한책임 원칙이다. 이에 비해 이사의 충실의무는 고용주인 회사와 피용자인 이사간 직접적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와중 이사의 의무 범위를 모든 주주에까지 확장하는 것은 주식회사의 본질과도 동떨어진 일이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주주와 기업의 이익을 아예 별개 사안으로 볼 수 있는지도 논란거리다. 만일 둘이 별개가 아니라면 현행 규정을 개정할 필요성이 낮아져서다. 이철송 건국대 법학전문대학교 석좌교수는 "모든 주주는 지분을 통해 간접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누린다"며 "기업이 각 주주를 임의로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주주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한은 지배주주와 회사에만 유리하고 일반주주엔 해가 되는 자본거래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국인 법무부에선 개정안이 시행된대도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입장이다.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중요해지면 소액주주만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서다. 대주주 역시 지분에 비례한 이익을 법적으로 기업에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법무부는 앞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실제 규정이 생기더라도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규정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정부가 내놓은 ‘밸류업 프로그램’ 내용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에 관한 상법 개정안이 들어가지 않은 것도 이같은 우려가 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법체계·제도 활용도부터 끌어올려야"
재계에선 일반주주 권익 보호를 위해 사안별로 보다 실용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쪽이 낫다고 보고 있다. 배당 절차, 자사주 활용 등 개별 사안마다 주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쪽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법 체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기업과 주주 모두에 더 이득이란 판단이다.기업이 고성장 부문을 떼어내 독립시키는 물적분할에 대한 제도가 대표적이다. 모기업이 물적분할을 통해 자회사를 만들어 상장할 경우 모기업은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투자금을 끌 수 있다. 반면 모기업 소액주주들은 주요 사업부가 분리된 모기업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시장 평가에 손실을 볼 수 있다. 2022년 1월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엔 물적분할을 반대하는 주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별다른 장치가 없었다.
금융감독당국은 작년부터 기업이 물적분할을 추진할 때 주주 보호 방안, 상장계획 등을 공시하도록 하고 반대 주주에게 주식매수청구권을 주도록 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이 조치 이후인 작년 물적분할을 추진한 상장사 수는 19곳으로 전년(35건)에 비해 45.7% 줄었다. 작년 말엔 법무부가 상장사를 비롯해 비상장사에 대해서도 물적분할에 반대하는 주주의 주식매수청구권을 인정하는 상법 개정에 나선 상태다.
주요 국가도 이사의 책임을 키우는 대신 개별 사안마다 기업이 주주 보호를 위해 자체적인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분위기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일본은 기업이 주주와의 대화를 늘려 주주환원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도 마찬가지다. 이사의 폭넓은 경영 판단을 인정하고,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주주가 피해를 입증하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영국 고등법원도 최근 이사의 지위 자체만으로는 주주에게 충실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고 최근 판시했다"며 "이같은 추세는 이사가 모든 경영 상황에 대해 전체 주주를 고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국내 논의와는 완전히 딴판인 것"이라고 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