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중인데 활주로 뜯어고치라니"…워런 버핏의 '울분'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는 에너지 분야 소식을 국가안보적 측면과 기후위기 관점에서 다룹니다.

전기와 그리드(grid)의 세계-상
전설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연례 보고서에서 300번 가까이 언급한 단어가 있다. 바로 산불이다. 벅셔해서웨이의 계열사인 미국 서부 최대 전력기업 퍼시픽코프가 산불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것에 대한 울분이 주를 이뤘다.

퍼시픽코프는 2020년 오리건주와 캘리포니아주를 강타한 역대급 산불에서 전력계통(전력망 Grid) 관리 부실 책임을 지고 있다. 버핏은 연례 보고서에서 당시 산불로 인한 퍼시픽코프의 예상 손실 추정치를 기존 4억달러에서 24억달러로 대폭 상향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돈을 들여야 하나"…버핏의 토로

그는 "퍼시픽코프는 이미 7억3500만달러 합의금을 지급하고 망 관리 비용으로 6억달러 이상을 지출한 데다, 향후에도 송배전선 매설 및 절연 등에 11억달러를 더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회사는 최근 이 문제로 기소까지 되면서 80억달러의 손해배상금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배심원단이 중과실 평결을 내릴 경우 배상금 규모는 2~3배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전력 유틸리티는 벅셔해서웨이에서 오랫동안 '캐시 카우'로 통했다. 버핏은 2년 전만 해도 전력계통 사업을 회사의 4대 거인으로 꼽을 정도로 안정적인 수익원이 돼 주는 전력망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 연례 보고서에서 산불이란 단어를 수백 차례 부르짖은 그는 "규제 당국이 (과도한 책임을 물어) 전력망 업계 전반에 '파산의 유령'을 드리우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전력 유틸리티 업계의 말로는 불길할 수 있다"며 "(화재) 사태가 진정되면 미국의 전력 수요와 그에 따른 자본 지출은 충격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진=AP
버핏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2일 "미 전역의 노후화된 전력망이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화재의 발화점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기 수요 폭증에다 극심한 이상 기온까지 더해져 낡은 전력망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갑작스러운 전압 서지 또는 강하는 대형 화재로 이어진다"며 "최근 미국의 전력 품질 악화는 최소 100만 가구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고 전했다.

또 다른 미 서부 전력회사 PG&E는 산불 배상금 등으로 약 300억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2019년 파산 보호를 신청해야 했다. 지난해 6월 매사추세츠주 월섬에서 발생한 화재는 변전소의 전압이 갑자기 불안정하게 급상승하면서 발생했다. 두달 뒤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은 끊어진 전선에서 튄 불꽃이 도화선이 돼 지역 송전망 운영사인 하와이안 일렉트릭이 집단 소송을 당했다.올해 2월 미국 텍사스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을 일으킨 발화점도 엑셀에너지의 전선 설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사됐다. 2021년 콜로라도주에서 발생한 역대급 화재로도 피소돼 있는 엑셀에너지로서는 첩첩산중이다. 이처럼 전력망발(發) 화재가 잇따르자 미국 규제 당국은 "고온 건조한 강풍이 불 때 전력망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가정과 사업체를 정전에 빠트려서라도 산불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고의적인 정전이 해답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의 낡은 전력망은 이미 전역에서 정전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몇 시간 지속되는 정전은 기업들에 '실존적 위협'이 된다"며 "식재료가 상해버리는 식당부터 생산라인 가동 중단으로 수백만 달러를 잃는 제조업체까지 정전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2003년 미국 북동부 지역을 이틀간 암흑에 빠지게 만든 정전은 미국 국내총생산(GDP) 60억달러를 증발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비행 중에 활주로 고치는 셈"…빌 게이츠의 선견지명

전력망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가정이나 기업 등 수요처까지 전송하는 네트워크다. 전기가 고전압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송전선(고속도로)을 지나 이를 낮은 전압으로 바꾸는 변전소(출구 램프)를 통과하면 배전선을 통해 동네 전봇대 등에 흘러들어 간다. 이 전력망은 매순간 균형을 이뤄야 한다. 전력 품질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전기의 흐름이 균일하고 예측 가능한 전압과 속도로 전달돼 전력 소비가 언제나 발전량과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다.전기 주파수가 표준(미국 50㎐, 아시아 60㎐)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전력의 수요나 공급 중 어느 한쪽이 급증해 과전류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이로 인해 전력 품질에 문제가 발생한다. 전력 설비의 수명이 짧아지고 고장이 잦아지게 된다. 또한 정전이나 화재로 이어진다. 전력 공급이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도 문제다. 주파수에 좌우되는 터빈이 헛돌면서 발전소가 고장나기 때문이다.
전력망이 받는 스트레스는 최근 전례없는 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분산 전원이자 유량(flow)자원인 신재생에너지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도처에서 벌어지면서다. 동시에 암호화폐 채굴, 인공지능(AI) 열풍 등으로 전력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최근 몇년 사이에 변동성이 심해진 이상 기온은 가뜩이나 낡은 전력 인프라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전력망은 70% 가량이 1970년대 세워져 사실상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컨설팅기업 그리드폴리시의 존 웰링호프 최고경영자(CEO)는 "탄소중립을 위한 '모든 것의 전기화'가 진행될수록 전력망 문제는 더욱 심각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망은 전선을 갉아먹는 설치류나 웃자란 나뭇가지 등에 의해 언제든 전압 변동을 겪을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력 시스템의 복원력을 높이고 전력 품질을 제어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은 유틸리티 기업들의 책임이고, 이는 결국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퇴임 후 에너지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과거 한 강연에서 "전력망의 현대화는 에너지 미래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예견했다. 그는 "2050년까지 전력망의 용량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늘리는 동시에 기존 전선의 대부분을 교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원인 그레천 바크의 책 '그리드'에 따르면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미국 국방부에는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보고서가 제출됐다. 미래에 재발 가능한 석유 수입 중단보다도 전력망의 취약함이 국가 안보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책에서 바크 연구원은 "전력망 업그레이드 문제는 마치 항공기가 승객을 가득 채운 채 비행하는 상태에서 (착륙하기 전에) 활주로와 항공 관제 시스템 등을 재구축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기 의존도가 최고조에 이른 현대사회가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일 없이 인프라를 전면 교체하는 작업의 난이도를 설명한 것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