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몽마르트 환락가를 떠돌며 낮은 곳을 그려낸 로트레크
입력
수정
[arte] 이명옥의 명작 유레카"B와 D 사이에 C가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64~1901)
인생은 선택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이다“ 라는 강연에서 한 말이다. B는 출생(Birth), D는 죽음(Death), C는 선택(Choice)을 뜻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의미다.19세기 인상주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동시대 인상주의 예술가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해 세계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캔버스에 옮겼다.
로트레크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189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 유흥가의 실내공간을 주요 소재로 삼아 화려한 밤 문화와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관찰자의 시각으로 포착한 로트레크의 작품들은 프랑스 예술의 황금기인 벨 에포크(아름다운·좋은 시절) 시대 파리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근대적 삶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이 그림은 뛰어난 관찰력과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당대 사회상을 포착한 로트레크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1889년에 문을 연 댄스홀 ‘물랭루즈’의 남성 무용수인 발렌틴이 여성 무용수에게 캉캉(1830년경부터 파리의 댄스홀에서 유행한 사교춤)을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발렌틴이 허리에 손을 얹고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을 취하고 여성 무용수는 생기 넘치는 발차기 동작으로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로트레크는 댄스 홀 중앙에 있는 남녀 무용수의 역동적인 몸동작과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관중의 정지된 상태를 대비시켜 감상자가 춤추는 장면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듯한 현장감을 전달했다.
이 그림은 로트레크가 야외 풍경을 그리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다른 독창적인 화풍을 통해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굵고 강한 흑색 윤곽선, 단순화와 과장, 선명한 색채 대비, 동적인 시점과 각도 등을 활용하여 감상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움직임과 활력, 공간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화면 앞에 서 있는 여성의 분홍색 드레스에서 여성 무용수의 빨간색 스타킹으로, 왼쪽 배경 여성의 빨간색 재킷 방향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이동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흥겹고 활기 넘치는 댄스 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실내공간의 깊이감을 이끌어냈다. 로트레크가 "당대 사회의 가장 뛰어난 관찰자", "몽마르트르의 기록자"로 널리 인정받게 된 배경에는 그의 신체적 조건이 영향을 미쳤다.그는 프랑스의 명문 귀족 가문인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백작’의 맏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릴 적 유전질환에 따르는 퇴행성 뼈 질환을 앓으며 13세부터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추는 기형적 장애를 갖게 됐다. 다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유전병은 그의 부모가 사촌지간이었던 근친교배의 가족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로트레크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의 상체는 평균 정도였지만, 키는 약 150cm에 머물렀다. 게다가 입술과 코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두꺼워진 형태로 변형되어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이러한 신체적 조건은 로트레크의 삶과 창작방식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야외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신체적 약점을 예술적 강점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1883년 어머니 아델 백작부인의 경제적 지원으로 보헤미안 문화의 산실이자 향락의 중심지였던 파리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마련했다. 몽마르트르에서의 생활은 그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예술을 통해 사회와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는 13년 동안 날마다 카바레, 극장, 카페, 레스토랑, 서커스 바 등 유흥가에서 밤을 보내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기는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밤의 환락가는 다양한 사회 계층과 인물들이 교류하는 공간이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상호작용과 감정의 교환을 세밀하게 포착해 그림으로 옮겼다.
특히 ’물랭루즈‘의 개방적인 분위기와 그곳의 무용수, 가수, 곡예사, 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삶을 통해 당시 사회의 이면을 탐구할 수 있었다. 로트레크는 특권층인데도 자신을 늘 소외된 사람으로 여겼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있을 때 동질감이나 편안함을 느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은 그가 유흥가의 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회 풍자적인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창작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그는 차별화의 벽에 갇힌 이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그들이 당면한 사회적 현실과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어두운 삶을 예술을 통해 포착하고 기록했다. 이러한 예술관의 선택은 그가 신체적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공감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편견에 도전해 모든 인간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강조한 로트레크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로트레크는 항상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회에서 부도덕하고 낙인찍히고 소외된 사람들과 경멸당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로트레크가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몽마르트르 밤의 유흥가를 단순한 흥미의 대상이 아닌 그 시대의 정신과 사회적, 문화적 생활을 관찰하고 작품에 구현했기 때문이다. 로트레크의 작품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해야 하며, 이러한 선택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관련 칼럼] 키 152cm '금수저', '클럽 죽돌이'로 살았던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