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의 피해자는 언제나 유순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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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기획은 평소와 달랐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 감독이었던 이시바시 에이코가 공연을 위한 영상 제작을 의뢰했던 것. 데모 음악과 영상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추상적인 이미지를 나열하는 뮤직 비디오 대신 명확한 서사를 가진 영상물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원래는 30분짜리 단편이었던 기획은 100분이 넘는 장편 영화로 완성되었다.
영화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언제나
이시바시 에이코의 공연용 영상은 따로 무성으로 편집해서 < Gift >라는 제목을 붙였다. 감독에 의하면 < Gift >는 상영 시간뿐 아니라 스토리도 다르다고. 촬영 소스는 동일하지만 다른 쇼트와 테이크를 썼고 내러티브에도 차이가 있다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평행 우주’란 감독의 말도 너스레가 아닐 것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로운 정점
이제껏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은 ‘말하고 듣는’ 영화로 알려져 있었다. 대본 리딩과 리허설에 공들이는 그의 연출론에 걸맞게 <해피 아워>,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까지 그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고, 문장 사이의 호흡과 침묵에는 감정과 의미가 부여되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짐작과 묵인이 오해를 만들고 비밀을 키우는가 하면,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사이 누적된 사소한 차이들이 인물들의 진심과 진실을 가늠하게 만들기도 했다. ‘방금 무엇인가 일어났다’ 감지하는 순간을 거쳐 인물들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마침내 각자의 구원과 용서, 화해에 도달하는 식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글이 말로 변하는 과정, 그 순간에 부여되는 우연과 상상력을 통해 ‘말하고 듣는’ 영화를 성취했던 셈이다.<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다. ‘말하고 듣는’ 대신 카메라는 - 얼핏 무심하고 태평하게 느껴질 만큼 - 숲속과 들판을 떠돌고, 이미 지나온 길과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두드러지는 ‘응시’의 순간들은 반복을 거쳐 습관이 된 행위들, 사람과 사슴, 숲에 누적된 시간을 관찰한다. 서사의 흐름에 따라 개울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행위의 주체가 달라질 즈음에는 ‘말하고 듣지’ 않아도 ‘응시’를 통해 인물들의 변화와 결심은 효과적으로 포착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닌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전제로 한다. 같은 공간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도와 감정을 파악하는 것.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화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자동차 대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감정과 서사를 쌓아 나가는 섬세한 대화 장면을 찾기 어렵다.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말을 할 뿐이다. 대화가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보다 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배경은 작은 산골 마을이다. 몇 안 되는 주민들은 서로를 다 알고, 개울 물을 길어 우동을 만들며, 음식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작은 약초를 알아보고, 들판에서 주운 깃털을 선물하며 살아간다. 숲과 자연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이미 진작에 터득한 것 같다. 그런데 마을 근처 숲속에 글램핑장을 조성하려는 업자들이 등장한다.당장 눈앞의 이득에 급급한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영악하게 결합한 지역 개발 계획은 ‘부가 수익 창출’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담당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설명회가 이어진다. 주민들이 계획의 허점을 지적하고 변경을 요구할 때까지는 얼핏 선명해 보였던 선악의 대립 구도는 수익 배분 구조에 따라 책임감도 나눠 가진 것 같은 사장과 컨설턴트가 ‘해법’을 떠들 무렵부터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라는 마을 노인의 말은 단순히 중력이 작동하는 지형 구조에 대한 일반 상식일 리 없다. 글램핑장의 정화조 위치에서 시작해서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 상류에 있는 사람에게는 의무가 있다’에 이르면 이제 이 문장은 진실은 사회 계급 구조 혹은 세대론으로 확장된다. 자연과 사람의 균형을 강조하는 말들은 충분히 지혜롭고 공평한 것처럼 들리고, 영화 속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탈하고 지루한 시간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정확한 인과 관계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우발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여리고 유순한 것들이게 마련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관객 모두 각자의 혼란과 상념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방심했을까. 아니면 혹시 오만했던 것은 아닐까. /옥미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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