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의 피해자는 언제나 유순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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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
영화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언제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식 포스터](https://img.hankyung.com/photo/202403/01.36248080.1.jpg)
이시바시 에이코의 공연용 영상은 따로 무성으로 편집해서 < Gift >라는 제목을 붙였다. 감독에 의하면 < Gift >는 상영 시간뿐 아니라 스토리도 다르다고. 촬영 소스는 동일하지만 다른 쇼트와 테이크를 썼고 내러티브에도 차이가 있다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평행 우주’란 감독의 말도 너스레가 아닐 것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로운 정점
이제껏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은 ‘말하고 듣는’ 영화로 알려져 있었다. 대본 리딩과 리허설에 공들이는 그의 연출론에 걸맞게 <해피 아워>,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까지 그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고, 문장 사이의 호흡과 침묵에는 감정과 의미가 부여되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짐작과 묵인이 오해를 만들고 비밀을 키우는가 하면,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사이 누적된 사소한 차이들이 인물들의 진심과 진실을 가늠하게 만들기도 했다.<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다. ‘말하고 듣는’ 대신 카메라는 - 얼핏 무심하고 태평하게 느껴질 만큼 - 숲속과 들판을 떠돌고, 이미 지나온 길과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두드러지는 ‘응시’의 순간들은 반복을 거쳐 습관이 된 행위들, 사람과 사슴, 숲에 누적된 시간을 관찰한다. 서사의 흐름에 따라 개울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행위의 주체가 달라질 즈음에는 ‘말하고 듣지’ 않아도 ‘응시’를 통해 인물들의 변화와 결심은 효과적으로 포착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닌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전제로 한다. 같은 공간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도와 감정을 파악하는 것.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화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자동차 대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감정과 서사를 쌓아 나가는 섬세한 대화 장면을 찾기 어렵다.당장 눈앞의 이득에 급급한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영악하게 결합한 지역 개발 계획은 ‘부가 수익 창출’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담당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설명회가 이어진다. 주민들이 계획의 허점을 지적하고 변경을 요구할 때까지는 얼핏 선명해 보였던 선악의 대립 구도는 수익 배분 구조에 따라 책임감도 나눠 가진 것 같은 사장과 컨설턴트가 ‘해법’을 떠들 무렵부터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우발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여리고 유순한 것들이게 마련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관객 모두 각자의 혼란과 상념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방심했을까. 아니면 혹시 오만했던 것은 아닐까. /옥미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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