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법 표현들이 일제 잔재로 신음하는데 국회는 뭐하나 [서평]

대한민국의 법은 아직도 1950년대입니다

김세중 지음
두바퀴출판사
365쪽|2만원
Getty Images Banks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세상처럼 터무니없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 법이 그렇다. 민법, 형법, 상법 등 대한민국 법률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기본법에 말이 안 되는 문장, 국어에 없는 단어가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의 법은 아직도 1950년대입니다>는 그런 법 문장의 황당함을 지적한 책이다. 책을 쓴 이는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15년까지 국립국어원에서 27년 동안 학예연구관으로 일했던 김세중 씨다. 퇴직한 그의 눈에 법조문의 비문이 눈에 띄었다. 2022년 <민법의 비문>이란 책을 냈고 이번에 민법과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으로 범위를 넘혀 책을 냈다. 민법 제8조 1항은 이렇다.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허락을 얻은 특정한 영업에 관하여는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 누가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는 것일까. 미성년자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문장에서 미성년자는 허락을 얻은 주체일 뿐 전체 문장의 주어는 아니다. 저자는 ‘미성년자가’를 ‘미성년자는’으로만 바꿔도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고 말한다.
책은 이런 사례로 가득 채워져 있다. 민법 제70조 2항 “총사원의 5분의 1이상으로부터 회의에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 때에는 이사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야 한다”는 ‘총사원의 5분의 1이상이’라고 쓰면 될 일이다.

조사를 잘못 쓴 예도 부지기수다. ‘조건에 위반하거나’, ‘정관에 위반하여’, ‘명령에 위반한 자는’ 따위다. 이는 ‘조건을 위반하거나’, ‘정관을 위반하여’, ‘명령을 위반한 자는’으로 바꿔 써야 한다. 일본어 잔재도 많다. 민법 제2조 1항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다. 일본 민법 제1호 2항 “권리의 행사 및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한자 좇을 종(從)을 ‘좇다’로, 일본어 조사 니(に)를 ‘에’로 번역하면서 어색한 문장이 돼 버렸다.

‘~에 좇아’는 민법에 자주 등장한다. ‘상사회사설립의 조건에 좇아’, ‘회복자의 선택에 좇아’, ‘부동산의 용도에 좇아’, ‘채무 내용에 좇은’ 등이다.

저자가 기괴하다고 말하는 문장도 있다. 상법 제572조 2항은 “전항의 규정은 정관으로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이다. 그냥 “전항의 규정은 정관으로 다르게 정할 수 있다”고 써도 될 문장이다. 민법 제185조 “물권은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고 정상적인 한국어라고 할 수 없다. 민법, 형법, 상법 등이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탓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법조문은 이렇지 않다. 사실 정부와 학자들이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2002년 개정된 민사소송법은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완전히 새롭게 쓰였다. 법무부와 법제처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바꾼 민법 개정안을 19대와 20대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가 이를 처리하지 않았다.

이상한 문장을 이해하려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사회적 낭비다. 변호사, 법무사 등을 꿈꾸며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데 힘을 쏟게 한다. 법 조문을 찾아볼 일이 생긴 일반인들에게도 괴로움을 안겨준다.

저자는 “우리나라 국회는 입법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민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데 너무나 무관심했다”며 “대한민국 기본법이 구시대의 모습에서 탈피해 현대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오로지 국회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