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다, 전종서는 마침내 그레이트 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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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해미(전종서)는 길거리에서 몸을 흔들며 점포 개업식을 홍보하는 일을 하는 여자다. 그녀는 어느 날 그 거리에서 택배 일을 하던 어린 시절의 친구 종수(유아인)를 만난다. 둘은 골목길에서 담배를 나눠 피다가 자신들이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정확하게는 여자만 남자를 알아본 것이긴 했지만. 둘은 그날 저녁 술을 마신다. 그날 술 자리도 사실은 여자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어린 시절 종수는 우물에 빠진 해미를 구해 낸 적이 있다. 해미는 술을 마시면서 남자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아프리카 부시맨들 사이에는 리틀 헝거하고 그레이트 헝거가 따로 있대.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사는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그레이트 헝거가 더 좋은 거래. 멋있지? 그레이트 헝거.” 이창동 감독의 특이한, 무라카미 걸작 <헛간을 태우다> 만큼 특이한, 아니 보다 더 깊은 심연의 영화 <버닝>에서 전종서는 해미 역을 맡는다. 전종서는 이 대목의 연기에서 초롱초롱 빛난다. 자연스럽게 저 배우가 누구일까, 어디서 왔을까, 어느 별에서 왔을까를 궁금하게 했다. 뭐랄까. 이상한 불균형이 매력적인 모습 같았다고 할까.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차이가 갖는 의미보다 그 말이 갖고 있는 ‘큐트’한 맛에 더 빠져 있는 치기 어린 여자의 캐릭터였다. 살다 보면 그런 여자 혹은 그런 남자를 만나곤 한다. 말의 의미보다는 말의 멋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전종서는 <버닝>에서 딱 그런 역을 소화해 냈다.
이창동 감독의 ‘디렉팅’도 그랬을 것이다. “종서, 너는 행사장 알바女야. 그러니까 이런 대사를 유식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하면 안돼. 행사장에서 몸을 흔들 듯 해봐.” 뭐 그쯤의 연출 지시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뇌피셜’이다.
전종서가 그 다음 작품인 넷플릭스 영화 <콜>로 백상예술대상과 부일영화상, 디렉터스 컷 어워즈에서 모두 최우수 여자 연기상을 탄 것은 순전히 <버닝>의 영향이 컸다. 그러니 전종서의 지금, 그녀의 성장은 다 이창동 덕이다. 그건 마치 문소리가 이창동의 <박하사탕>에 단 한 씬만 출연한 이후 <오아시스>로 주연이 돼 스타덤에 오른 것과 같은 얘기이다. 물론 <콜>은 이창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작품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창동 만큼 떡잎을 알아 보는 감독도 드물다는 얘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전종서는 떡잎이다. 떡잎이 됐다. 아직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라 부르기에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지만(일단 작품 편수가 아직 적다.) 최근 들어 부쩍 대중적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전종서는 얼마 전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월드 투어 서울 시리즈 스페셜 게임 때 시구를 했다. 언론과 파파라치들은 그녀의 레깅스 차림 옷을 강조하며 ‘논란이었다’는 기사를 냈지만 사실 논란은 전종서의 레깅스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럼에도 전종서는 이번의 사진 한 장으로 금방 ‘전국구’가 됐다. 아마도 그 모든 건 그녀의 매니지먼트 소속사의 기획일 것이다.
마침 전종서는 지금 한창 로맨티 코미디 <웨딩 임파서블>에 출연 중이다. 대중들의 주목이 필요할 때이다. 시청률이 그다지 나오지 않고 있는 드라마의 홍보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웨딩 임파서블>은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고, <버닝>의 여배우가 왜 이런 드라마에 나올까 궁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어느덧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비즈니스 세계로 깊숙이 들어 왔고 소속사(앤드마크)가 여러 ‘궁리’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배우 본인으로서도 화제를 만들어 내고 ‘몸값’을 올리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그녀의 ‘몸값’은 영화 <몸값>으로 이미 뛰어 오른 상태이긴 했다. <몸값>에서 전종서는 그녀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철벅철벅 잘도 해낸다. 사람의 장기를 경매로 진행하는 모습, 말투가 그렇게나 이중적일 수가 없을 정도다. 인공적이고 작위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전종서의 연기는 다분히 연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자 이제부터 잘 봐, 내가 연기에 들어 갈 거야 하는 느낌을 준다.(전종서는 안양예고, 세종대 영화과 출신이다.) 이런 연기 투는 캐릭터가 센 역에 어울린다. 창녀, 양아치, 일진, 색녀 등에 맞는다. <몸값>이 그랬다.
손석구와 나온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도 전종서는 거침없이 어제 밤의 잠자리와 섹스의 기술, 남자의 물건 크기를 입에 올린다. 전종서는 이런 연기가 어울린다. 전종서에게 <웨딩 임파서블> 같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는 여배우에게 있어 통과의례와 같은 일이다. 전종서는 요즘 그렇게 또 다른 관문을 하나 통과하는 중이다.전종서의 영화 중 가장 ‘괴랄’스러운 작품은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이다. 지난 해 초에 개봉돼 2만명 좀 넘게 모은 작품이다. 폭망했던 영화였는데 작품보다는 개봉 시기가 문제였다. 이 영화는 코로나 직전에 촬영돼 개봉이 한참이나 미뤄지다 공개됐다. 이미 창고 안의 과일은 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계 영국 감독 애나 릴리 애머푸어(혹은 아미푸르)는 그렇게 슬렁슬렁 넘어 갈 감독이 아니다. 그녀는 2014년작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로 한바탕 화제를 모았으며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도 그 때의 명성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서 전종서는 모나(리자) 역을 맡는다.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탈출한다. 여자는 사람의 마음과 몸을 통제하는 능력을 지녔다. 스트립 댄서 보니(케이트 허드슨)는 모나의 초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돈을 갈취한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두 여자의 버디 무비인 양, 둘이 겪는 이런 저런 해프닝을 기록해 내지만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마치 현세에 나타난 걸인 여자 예수의 길거리 인생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수가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며 다녔던 것도 영화 속에서 모나리자가 살짝 맛이 간 채 초능력을 구사하며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른 차이가 없을 지도 모른다. 기적은 어느 시대에나 이상한 것이며 단지 그 기적이 향하는 곳,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서 전종서는 역시 자신이 ‘또라이’ 연기에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연기와 역할을 척척 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찾으면 없다. 특히 2,30대 여배우 중에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정은은 50대 중반이고 김선영은 40대 후반이다. 젊은 배우 중 이상희가 ‘미친 연기를 미친듯이 하는’ 배우 중 한 명인데 그녀 역시 40을 넘겼다. 갓 서른인 전종서를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찾는 이유이다.전종서가 자기 안의 폭력성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영화가 <발레리나>이다. <콜>을 만들었던 이충현 감독의 후속작이었으며 아무리 넷플릭스 영화이긴 해도 장면 하나 하나에 돈을 엄청 ‘발라댔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화려한, 레즈비언 액션 누아르이다. 옛 첩보무장요원인 옥주는 오랜 친구이자 연인인 여성 민희(박유림)가 살해 당하자 가혹한 복수극에 나선다. 응징의 모습이 가차가 없다. <발레리나>를 보고 있으면 이제 실제 연인이 된 감독 이충현과 주연 여배우 전종서가 지금의 세상에 대해 처절한 응징의 복수극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영화감독과 여배우는 서로 얼터 에고의 관계이다.전종서를 보고 있으면 여자 부기맨이 생각이 난다. 처음엔 리틀 헝거였을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전종서는 아직 그레이트 헝거까지는 되지 못했다.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지만 그게 어쩌면 자신의 (거친) 삶에서 그대로 배어 나온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준다.(그녀는 중학교를 자퇴한 후 캐나다를 오가며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는 자기 것만으로 연기를 해서는 안된다. 남의 것도 빌려 와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 더 배워야 한다. 더 깊이 사고를 해야 한다. 전종서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레이트 헝거가 될 것이다. 그건 이창동의 예언 아닌 예언이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