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냉혹하고 원래부터 결함이 많은 제도다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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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의 논쟁은 아주 유명하다. 불황기 정부의 역할과 시장 개입 효과를 두고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치열한 이론 다툼을 했다. 케인스는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재정과 금융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의 수호자’ 하이에크는 정부가 개입할수록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인플레이션이 악화해 경제가 더욱 엉망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1인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정책 제안에 대한 찬반 논란 역시 과거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벌였던 논쟁과 너무 닮아있다.
英 좌파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의 책
‘시장이 얼마나 건강한가?’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정 기능이 있는가?’는 자유 시장 경제의 성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시장이 결코 건강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줬다. 최근 영국에서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벌처 캐피탈리즘(Vulture Capitalism)>은 제목에서부터 섬뜩함이 느껴진다.벌처(Vulture)는 썩은 고기만을 먹고 사는 대머리독수리를 의미하는 단어다. 기업 구조조정이나 부실자산 매각 등으로 수익을 올리는 펀드를 가리켜 ‘벌처 펀드’라고 부르는데, 벌처 캐피탈리즘이란 제목만으로도 책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책을 쓴 그레이스 블레이클리(Grace Blakeley)는 1993년생으로 최근 영국에서 주목받는 좌파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다. 청년 세대가 만든 대안 언론 노바라 미디어(Novara Media)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재는 계간 트리뷴에서 활동 중이며 <금융 도둑>과 <코로나 크래시>에 이어 이번 <벌처 캐피탈리즘>에 이르기까지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책들을 잇달아 펴내고 있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해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은 잘못됐다”라면서 “자유 시장은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고 고발한다. 경제학 이론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은 그리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고, 기업 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배분되지 않는다. 선택의 자유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실행되고 있다.저자는 JP모건, 보잉사, 포드사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기업 사례를 소개하면서, 최근 문제가 되는 여러 위기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다름 아닌 ‘자본주의 자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고장 난 게 아니라 원래부터 구조적 결함이 많은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재분배’라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거라 기대하지만 사실상 재분배를 계획하고 주도하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다. 빈 병에 소변을 봐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해야 하는 아마존 근로자들처럼 보통 사람들의 자유는 줄어들고 있다. 반면 기업의 힘은 점점 세지고 있다.보잉사는 결함 있는 설계로 인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사고 이후에 지나치게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사고는 줄지 않고 있다. 보잉사가 미국 정부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지속적인 로비 활동으로 안전하지 않은 비행기도 이륙할 수 있는 허술한 규제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의 성공 여부는 경제가 아닌 정치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