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고소하다 '빚더미'...'미생 탈출' 시도했던 괴짜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피카소가 존경한 '그리스 사람'
엘 그레코(1541~1614)
끊임없는 소송전 벌이고
가난에도 시달렸지만
'미생'에서 '완생'으로
촛불을 붙이기 위해 불씨를 부는 소년(1570년대 초).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
고소, 고소, 그리고 또 고소. 남자는 자신의 고객들에게 끊임없이 소송을 걸어댔습니다. 내용은 ‘돈을 더 달라’는 것. 법정에 나갈 때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런 똥값에 물건을 넘기라고요? 내가 외국인이라서 지금 막 나가는 겁니까?”

남자의 이름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다만 길고 어려운 그의 그리스식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 그레코’(그리스인)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다른 별명을 수군댔습니다. ‘고소왕’, ‘돈에 미친 그리스 놈’이라고요.엘 그레코 자신도 그런 평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송을 계속해봐야 얻을 게 전혀 없다는 것도요. 사람들을 고소해 돈을 벌기는커녕, 막대한 소송 비용을 대느라 남자는 막대한 빚까지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송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외국인 사업가였고, 싸움닭이었으며, 가난한 아버지였고,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젖힌 위대한 화가, 엘 그레코의 사연을 풀어 봅니다.

섬 동네 출신 ‘미생 화가’

엘 그레코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의 고향은 그리스 인근의 크레타섬.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 전설로 유명한 이 섬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1541년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콘(동방 교회의 종교화)을 그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금세 두각을 드러내 20대 초반에 이미 대가로 대접받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을 만들고 고가의 의뢰를 받아 작품들을 그려낼 정도로요. 자기 일만 하던 대로 잘하면 남은 평생 부와 성공을 누릴 수 있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습니다.
성모영면(1567). 그의 초기작 이콘으로,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높은 완성도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그리스 시로스 섬 에르무폴리스 성모영면 대성당
하지만 엘 그레코의 눈은 바다 너머의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콘은 형식이 정해져 있는 그림. 아무리 잘 그려도 화가 본인의 개성이나 열정을 그림에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와 베네치아 등지의 르네상스 거장들은 각자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엘 그레코는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이콘 화가로 일하면서 평생 부족함 없이 살다 죽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나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처럼 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그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베네치아행을 결심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엘 그레코를 말렸습니다. 비유하자면, 성공한 청년 사업가가 갑자기 사업을 내던지고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롭게 도전하고 싶다”며 미국에서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하는 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걱정은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천재적인 화가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티치아노였습니다. 베네치아의 ‘1타 화가’인 그는 대부분의 의뢰를 독점했습니다. 라이벌을 자처하는 천재 화가 틴토레토와 베로네세조차, 티치아노가 바쁠 때를 노려 하나씩 일거리를 가져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일감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탓에 다른 곳에 가면 거장 대접을 받을 만한 천재들조차 베네치아에 왔다가 아예 붓을 꺾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니 젊은 촌뜨기 화가 엘 그레코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은 것도 당연했습니다.

처음으로 세상의 쓴맛을 본 엘 그레코.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엘 그레코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유럽 예술의 중심지 로마에서 도전을 이어가기로 결심합니다. 선배 화가(줄리오 클로비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로마에 집을 구한 뒤 초상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초상화는 “(너무 잘 그려서) 로마의 모든 화가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빈센초 아나스타지의 초상(1571~1576). 한참 후대의 에두아르 마네를 연상시킬 정도로, 몇백년은 앞서간 '근대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뉴욕 프릭컬렉션
티치아노의 'Gerolamo Barbarigo의 초상'(1510년경). 엘 그레코가 그린 작품과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하지만 로마에서도 엘 그레코는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로마의 가장 큰 고객, 교황청 사람들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엘 그레코의 초상화는 확실히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문제는 이런 그림이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겁니다.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품격이 없지 않나? 성당 벽에 대규모 벽화를 그리게 하기에는 좀 부족한걸. 화가 나이도 너무 젊고….” 교황청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엘 그레코의 끝없는 자신감과 튀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엘 그레코는 교황청에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그 위에 훨씬 더 멋지고 교황청의 품격에도 맞는 그림을 새로 그리겠습니다.” 이미 엘 그레코는, 미켈란젤로보다 자신의 그림 실력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생각은 다른 기록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누군가 엘 그레코에게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 “미켈란젤로? 훌륭한 예술가지. 그림 그리는 법은 잘 모르긴 하지만.”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1570년경).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하지만 이런 제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자랑으로 여기던 교황청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저 촌놈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쫓아내 버려!” 그렇게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쫓겨나게 됐습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다섯 살.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인정받는다는 목표 하나로 10년을 달려왔지만, 그 도전은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이제 더는 안 되겠다. 할 만큼 했으니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을 겁니다. 엘 그레코가 롤 모델로 삼았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20대 초반부터 거장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엘 그레코는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난 여기서 끝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그는 새롭게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행선지는 바로 스페인의 도시 톨레도였습니다.

소송, 실패, 좌절

엘 그레코가 스페인행을 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 스페인은 돈이 많았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으로 떼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만큼 종교 그림에 대한 수요도 많았습니다. 반면 이탈리아에 비해 화가들 사이의 경쟁은 상대적으로 덜했습니다.
삼위일체(1577~1579). /프라도미술관
하지만 화가로 활동하기에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일단 스페인에서 화가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육체노동자로 취급받았습니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며 화가를 ‘고상한 예술가’로 대접하게 된 이탈리아와는 대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작품 가격을 결정하는 당시 스페인 특유의 방식(‘타사시온’)도 화가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하게 돼 있었습니다. 화가가 재료비를 선금으로 받은 뒤, 완성된 작품을 보고 고객과 합의해서 가격을 정하는 ‘후불제’였으니까요. 당연히 고객들은 갖은 트집을 잡아 그림값을 깎으려 했습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몇 년에 걸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결론이 날 때까지 화가는 돈을 받을 수 없었고, 소송에 시간과 돈을 무한정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가는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헐값에 넘기곤 했습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1577~1579). /톨레도 대성당 성구보관실
하지만 엘 그레코는 달랐습니다. 그는 그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가 스페인으로 와서 처음 수주한 대규모 작품,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엘 그레코가 제시한 가격은 900두카트(1억8900만원). 반면 고객이 제시한 돈은 227두카트(약 4770만원)에 불과했습니다. 4년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결정된 가격은 318두카트(6680만원)로, 사실상 엘 그레코의 패배였습니다. 소송 비용을 고려하면 처음 제시한 값을 그대로 받았을 때보다 손해. 하지만 엘 그레코의 생각은 확고했습니다. ‘나는 예술가다. 스스로 내 작품의 가치를 낮출 순 없어.’

여기에 또 하나의 좌절이 겹쳤습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으로 온 건, 왕의 궁정 화가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궁정 화가가 되면 좀 더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스페인 황실이 의뢰한 작품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는 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엘 그레코는 자신의 실력을 모두 쏟아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1580~1582). 성 마우리티우스는 3세기경 이집트 출신의 로마 군인으로, 287년에 순교한 기독교의 성인이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로마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걸 거부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따르는 군인들과 죽음을 맞는다. 이 주제를 다루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 대부분은 참혹한 순교 장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엘 그레코는 자신의 작품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고 순교하자"고 설득하는 성 마우리티우스의 의지를 강조했고, 순교 장면은 왼쪽 아래에 작게 배치했다. /엘 에스코리알 산 로렌소 수도원
왕은 이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서, 엘 그레코가 요구한 가격보다 더 후한 값을 쳐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군. 아주 뛰어나.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그림은 아니야. 우리가 필요한 건 좀 더 쉽고 종교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야. 앞으로 이 화가에게는 일을 맡기지 말게나.” 당시 스페인은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왕실에 필요했던 건 예술성 높은 작품보다는 일종의 ‘선동용 그림’이었습니다. 이후 황실은 엘 그레코에게 더 이상 작품 의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유명 화가였던 로물로 친친나토가 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1583). 스페인 황제는 엘 그레코의 작품을 수장고에 넣고, 친친나토에게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그 자리에 걸게 했다.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작품의 형식과 수준은 이 정도였다. 잘 그리긴 했지만 개성 없는 이 그림을 보면 엘 그레코의 작품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를 알 수 있다. 친친나토의 이름은 엘 그레코의 혁신과 창의성을 알리기 위한 '비교 대상'으로만 미술사에 남게 됐다. /엘 에스코리알
어느덧 엘 그레코의 나이도 40대. 고향을 떠난 이후, 그가 간절히 바라 온 것들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완전히 살아있지 못한 미생(未生)의 삶이었습니다.

좌절을 넘어 예술혼을 불태우다

수태고지(1590년대). /오하라미술관
하지만 엘 그레코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예술가로서 자존심과 확신이 있었고, 먹여 살릴 아내와 어린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 그레코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공방을 만들고 당시 스페인에서 새롭게 성장하던 ‘작은 종교 그림’ 시장에 진출한 겁니다. 그렇게 그는 신앙심 깊은 부자들의 개인 예배당과 벽에 걸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엘 그레코의 독창적인 화풍이 폭발하듯 꽃을 피운 건 이 시기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실패했던 건 어설프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썼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대가 나를 알아보건 말건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겠다.’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1590~1595).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얼굴은 초기 둥그스름한 모습에서 갈수록 야윈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톨레도 타베라 병원
가슴에 손을 얹은 귀족(1583~1585). 작품 속 모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돈 키호테'의 작가로 유명한 대문호 세르반테스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프라도미술관
이 시기(1580년대) 엘 그레코의 작품들은 갈수록 ‘주류 미술’과 멀어집니다. 원근법과 비례는 점차 부정확해지고, 사람의 몸과 얼굴은 야위어가며 길어집니다. 색채와 명암은 극적으로 과장되고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르네상스에서 멀어져 자신의 예술혼이 시키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는 엘 그레코의 출발점인 이콘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잔재주 없이 ‘본질’을 그리자는 게 이콘의 정신이었으니까요. 다만 ‘남들이 정해준 본질’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본질을, 이탈리아에서 배운 르네상스 미술의 장점과 섞어 그렸다는 점이 엘 그레코 그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훗날 미술사학자 키스 크리스티안센이 엘 그레코를 두고 “이콘의 평평한 세계와 르네상스 회화를 연결한 위대한 예술가”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의 화풍은 전통을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꽉 막힌 교황청이나 황실과는 달리 마음이 열려있는 일반인들 중에서는 이런 화풍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화풍엔, 마음을 흔드는 강렬함과 함께 ‘엘 그레코 작품이구나’ 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독창성이 있었습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 그렇습니다. 그림 아래쪽에서는 오르가즈 백작의 시신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위쪽에는 천사가 그의 영혼을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무대처럼 고루 빛이 쏟아지는 아래쪽과 달리 천상의 모습은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같은 시대 어느 나라 누구의 미술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비로우면서도 독특한 방식입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1586~1588). 엘 그레코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로, 피카소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스페인으로 '예술 여행'을 감행했다. 왼쪽 앞의 어린아이는 엘 그레코의 아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작품 세계는 이렇게 발전했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엘 그레코는 여전히 소송에 시달렸습니다. 이 작품을 놓고도 그는 제값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최종 가격은 1200두카트(2억5000만원)의 거액으로 결정됐지만 소송 비용과 그동안의 작업실 유지비, 인건비 등을 감안하면 이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소송이 이어지면서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습니다. 조수들에게 줄 월급도 걸핏하면 밀렸습니다.

불을 댕겨 ‘완생’이 되다

엘 그레코의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로스의 초상화(1600~1605). 목의 깃 장식은 대상이 고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데, 사실 당시 화가들은 육체노동자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기에 이런 깃 장식을 할 수 없었다. 스페인 화가들도 이탈리아에서처럼 고귀한 예술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엘 그레코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세비야 미술관
추기경(1600년경). 인물의 강직함과 고결함, 위엄을 잘 드러낸 걸작 초상화로 평가받는다. 해당 인물은 1600년 무렵 최고 종교재판관이었던 니뇨 데 게바라고,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해당 인물을 후원자로 삼아 경제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야심차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인물이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려 일반 추기경으로 강등되면서 엘 그레코의 경제적 안정도 멀어진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이때까지 수없는 좌절을 겪은 엘 그레코에게 작품값은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614년 73세의 나이로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며 갖가지 소송을 벌였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훗날 스페인의 후배 화가들이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제값을 받고 작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는 주춧돌이 됐습니다.

엘 그레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은 그의 작품이 품은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식적이고 과장됐다”는 평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도 수백 년 앞서 있던 그의 시각을 마침내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기술’에 가깝던 그림을 순수 예술로 확장한 선구자”(안토니오 팔로미노),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길을 안내하며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거장”(로저 프라이) 등 찬사도 쏟아졌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출신은 스페인이지만 대부분의 삶을 프랑스 등 외국에서 살았던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천재성과 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지 자신을 엘 그레코와 동일시해서, ‘나, 엘 그레코’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그렸을 정도입니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환영’을 많이 참고해 그린 작품입니다. 그 밖에도 폴 세잔, 외젠 들라크루아, 에두아르 마네, 잭슨 폴록 등 미술계 거장,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엘 그레코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성 요한의 환영(1608~1614). 이 작품은 1880년경 잘못된 복원 작업으로 인해 윗부분이 175cm 이상 깎여나갔다. 이로 인해 그림 속 요한(왼쪽 인물)이 무엇을 보고 이렇게 극적인 자세를 취했는지 알아내기가 어려워졌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1907).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다. /뉴욕 MoMA 소장
엘 그레코의 삶은 고난과 투쟁,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성공한 화가로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고, 그럴 기회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와 예술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느라 그의 화풍과 삶은 주변과 항상 겉돌았고, 갈수록 거칠고 고집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엘 그레코의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매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우화(1570~1575). /프라도미술관
이런 삶은 그가 생전에 자주 그렸던 ‘초에 불을 붙이는 소년’ 주제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불을 밝히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나도 주변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주변에 있던 위험한 것들도 나를 볼 수 있게 되니까요. 동물적인 본능과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원숭이, 위험을 상징하는 도적이 그림 속 소년을 빤히 바라보는 것처럼. 엘 그레코가 시대를 앞서간 그림을 그려 황실과 교황청에 거부당했고, 그의 작품과 삶의 방식이 놀라움을 넘어 당시 사람들 중 일부에게 불쾌감을 줬던 것처럼요.

하지만 그렇다고 타성에 젖어 어둠 속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엘 그레코는 생각했습니다. 그가 댕긴 불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표현할 수 있다는 창작의 불씨이자 자유의 불씨였습니다. 그 불은 활활 타올라 훗날을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의 마음에도 옮겨붙었습니다. 그렇게 미생의 삶을 산 엘 그레코는 최종적으로 ‘완생’(完生) 이자 전설적인 예술가가 되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까지 온기를 전하게 됐습니다.
자화상(1595~1600). 엘 그레코의 개성과 고집, 강렬한 의지가 담긴 눈이 시대를 넘어 먼 곳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좋은 주말 보내세요.**이번 기사는 El Greco: Ambition and Defiance(Rebecca J Long 등 지음), 엘 그레코(미하엘 숄츠 헨젤 지음, 김명숙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1두카트의 가치는 16세기와 현대의 구매력을 기준으로 단순 변환해 21만원으로 일괄 계산했습니다.
***칼럼을 기반으로 최근 출간된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관련해, 4월 11일 저녁 강남에서 북토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신청 및 자세한 행사 정보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 주세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