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홍콩 아트위크의 시작과 끝엔 모두 다니엘 보이드가 있었다 [홍콩 아트위크]
입력
수정
다니엘 보이드 단독 인터뷰
홍콩 애드미럴티 퍼시픽플레이스서
지난달 21일부터 이번달 8일까지
대형 설치작 '도안' 선보인 작가
호주 원주민으로 겪은 식민지 아픔 풀어내
한국의 여의도처럼 홍콩의 금융사가 밀집된 지역인 애드미럴티. 이 곳에 랜드마크처럼 자리한 대형 복합쇼핑몰 퍼시픽플레이스의 2층 창문은 홍콩 아트위크 내내 모두 가려져 있었다. 쇼핑몰의 통창을 가린 건 커텐도, 천막도 아닌 '구리 철판'. 가까이 다가가보면 마치 작은 점을 종이 위에 찍은 듯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쇼핑몰을 찾은 사람들은 오직 이 구멍 사이로만 창문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홍콩 최대 쇼핑몰 중 하나를 뒤덮은 철판의 정체는 호주 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작품이다. 그는 지난달 말 열린 아트바젤 홍콩의 인카운터스 섹션을 위해 이 작품을 쇼핑몰 크기에 맞춰 제작했다. '인카운터스'는 아트바젤 홍콩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작가들을 선정해 그들의 대형 설치작을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보이드는 이번 프로그램에서 창문 철판 설치작뿐만 아니라 건물 천장과 바닥에도 모두 작품을 배치해 쇼핑몰을 자신의 예술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보이드는 올해 선정된 작가들 중 유일하게 컨벤션센터 내부가 아닌 도심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가 됐다. 한창 그의 작품이 설치되기 시작하던 지난달 말, 홍콩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작품처럼 고요하고, 또 신중했다. 대답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도 길었다.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봤다.
보이드는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기 직전 가장 먼저 설치작을 보고 왔다고 했다. 그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컨벤션과 전시장을 벗어나 대형 쇼핑몰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게 즐겁다"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공개된 장소와 무작위적 만남이 오랜 작업활동을 해 온 그에게도 매우 설렌다고.보이드는 “내 작업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감을 만들기 때문에 좋은 기회다”라며 “일반적으로 전시회에 안 올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된다”고 말했다.그는 이번 작품을 만들며 바닥에도 ‘점박이 거울’을 깔았다. 지나가는 관객들에게 작품을 밟고 점 속의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올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실제 퍼시픽 플레이스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여기를 밟아도 되냐’라는 질문을 하며 작품 위로 올라섰다.
보이드는 “바닥에 보이는 거울 무대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작품”이라며 “이미 브리스번, 독일 베를린에 전시됐던 작업이지만, 어떤 관객이 밟고 스스로를 비춰보느냐에 따라 아예 다른 작품이 된다”고 덧붙였다.이번 홍콩 전시만을 위해 내놓은 작품의 가장 큰 차별점을 묻자 그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라는 점을 꼽았다. 보이드는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 무대 바닥을 거닐며 하는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내 작업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며 “이미 기존에 그 장소를 가 봤던 사람들도 내 작품으로 인해 공간을 다르게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그에게 2층 창문을 가려놓은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한눈에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당연히 보던 풍경을 다각도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며 “작품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가에 집중해 만든 작업물”이라고 말했다.
국내 관객들에게 다니엘 보이드는 '까만 바탕에 수많은 점을 찍는 작가'로 친숙하다. 이번 홍콩에 나온 작품도 수많은 점들로 이뤄졌다. 그는 이전부터 ‘수많은 점은 세상을 보는 렌즈’라는 표현을 썼다. 보이드가 이 점찍기 작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어봤다. 그는 “나는 나의 작업이 그냥 벽에 걸려있기를 원치 않는다"며 "관객들이 내 작품에 참여하며 작업을 활성화시켜주길 원한다"고 입을 뗐다.점을 렌즈로 활용한 이유에는 그가 가진 아픈 식민지 역사의 배경이 있다. 보이드는 “식민지 역사를 품고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인 내가 서양적 관점에 의해 너무 많은 역사가 단순화되는 과정을 봐 왔다"며 "사실 역사는 절대 단순한 게 아니지 않나"라고 되물었다.말을 멈추고 한참을 고민한 그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단순하게 정의내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 점이라는 렌즈를 찍기 시작했다"며 "특정한 경험이 일률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내 작품을 보고 다양한 생각을 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보이드는 스스로 ‘호주 원주민’이라는 뿌리에서 기반한 작업물을 계속 내놓고 있다. 이번 홍콩에 나온 작품 ‘도안'은 그 제목부터 호주 원주민의 언어를 차용해 지었다. 그는 "나의 민족은 영국 식민화 과정을 통해 모든 문화가 규정당한 역사가 있다"며 "그래서 더욱 이번 작품은 세계에 내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내 언어’로 제목을 지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 명의 작가가 동일한 주제, 비슷한 기법을 고집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다니엘 보이드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했다. ‘단순함을 통한 복합성’이다. 그는 “점을 찍는 표현 기법은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그렇지 않다”며 “내 작품은 한 편의 시처럼 단순한 기법 뒤에 다양한 의미가 있다. 마치 3분의 짧은 노래가 듣는 사람마다 다양한 느낌을 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보이드는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는 “내 작품을 한 가지 의미로 해석해달라는 것은 서양적 관점으로 재편된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며 “의미라는 건 정해진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마다 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할 자유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만들어내는 ‘식민지 역사의 아픔’을 담은 작품은 2024년 현재, 홍콩이 겪고 있는 사회적 상황과 닮아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우선 내 작업은 인간의 경험을 담은 작업이기 때문에 설치된 국가의 상황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며 “내 작업이 홍콩의 상황과 직접 연결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국엔 거울로 된 무대를 밟으며 관객들이 이 나라의 상황, 내 상황을 돌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1일부터 설치된 다니엘 보이드의 ‘도안’은 4월 8일을 끝으로 홍콩을 떠난다. 다니엘 보이드는 홍콩 아트위크의 시작과 그 끝을 모두 장식한 작가가 됐다. 대화를 마치며 홍콩을 떠난 후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공개할 수 없는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며 "스튜디오에서 실험하며 나를 데려다주는 곳으로 갈 거다”라고 웃었다.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일어난 그는 들고 왔던 가방을 고쳐맸다. 굵은 실이 얼기설기 엮인 크로스백. 탐내는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이 가방도 호주 원주민 전통 방식으로 만든 가방”이라며 설명을 해줬다. 그에게 ‘뿌리’는 작업의 원동력이자, 삶에서 뗄 수 없는 한 부분임이 분명해 보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