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찾은 브라질 거장의 예술…“미니멀한 작품, 한국과 닮지 않았나요”

브라질 ‘현대미술 선구자’ 리지아 파페 아시아 첫 개인전
안토니오 리알 파페 재단 디렉터·카푸신 페로 화이트큐브 총괄디렉터 인터뷰

신구체주의 주장하며 동시대 미술에 영감 불어넣어
“한국 시작으로 아시아에 작품세계 선보일 계획”
리지아 파페, O Ovo (The Egg), 1967
‘팍스 아메리카나’가 예술의 중심추를 미국으로 옮기기 전까지, 20세기 현대미술 흐름의 주도권은 유럽이 쥐고 있었다. 오랜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에 종속된 제3세계에 불과했다. 이 지역 예술이 서구 모더니즘의 모방물 취급 받았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런 경향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1950년대 브라질 예술가들은 막스 빌 등에 영향을 받아 구체주의에 열광했다. 자연, 주관, 상징적 의미를 배제한 기하학적 추상화를 그려낸 것이다.

1959년 ‘신(新)구체주의 선언’은 서구 모방을 넘어선 라틴아메리카식 창조의 시발점이다. 신구체주의 기수들은 관능적 감각을 강조하고, 작가와 관객이 작품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으로 서구식 합리주의에 기반한 구체주의 개념을 전복시켰다. 이 운동을 이끈 리지아 파페(1927~2004)의 예술세계는 동시대미술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에선 현대미술에 새로운 영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지아 파페 미디어 작품 'But I fly'(2001) /화이트큐브
‘브라질 현대미술의 선구자’ 리지아 파페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서울 신사동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열리는 ‘리지아 파페’(Lygia Pape) 전시다. 작가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한 아시아 첫 개인전이라 눈길을 끈다. 전시에 맞춰 방한한 안토니오 리알 파페 재단 시니어 디렉터와 카푸신 페로 화이트큐브 런던 총괄디렉터를 만나 전시의 의미를 물었다.

“서울에서 첫 아시아 전시, 이 작품 눈여겨 보라”

세계 정상급 화랑인 화이트 큐브는 지난해 서울에 첫 지점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지난 1월 일본 작가 미노루 노마타에 이어 화랑 문을 연 후 두 번째 개인전이다.

-파페의 아시아 첫 개인전 장소로 한국을 고른 이유가 무엇인가요.▶리알 “올해는 파페가 세상을 떠난 지 20주년이고, 3년 뒤면 탄생 100주년입니다. 한국을 기점으로 앞으로 아시아에서 여러 전시를 계획하고 있어요.”
안토니오 리알 리지아 파페 재단 시니어 디렉터 /화이트큐브
▶페로 “서울은 저희에게 중요한 장소예요. 기존 파페를 알던 애호가들은 아시아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단 기대감이 생길 거고,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이런 훌륭한 예술가가 브라질에 있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파페는 글로벌 명성에 비해 한국에선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어떤 예술가인가요.▶페로 “글로벌 근대·현대미술 모두에서 중요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어요. 50년 간 새로운 형태의 추상을 탐구했고, 관람자와 작품 간의 직접적인 상호관계에 대해 천착했죠. 그의 드로잉, 조각 등을 보면 미니멀하면서 작품 주변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 있어요. 이런 측면에선 ‘단색화’ 등 한국의 예술가들과도 접점도 있어요.”

-서울 전시에서 눈여겨 볼 작품은 무엇인가요.

▶페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 대표작품을 선보이면서 그가 추구했던 작품세계가 시대별로 어떻게 상호 연결성을 지니는지를 보여주려 했어요. ‘이건 꼭 보여줘야 해’라는 작품이 있는데 대표작인 ‘테테이아’(Ttéia’) 연작이 있어요."
카푸신 페로 화이트큐브 런던 총괄디렉터 /화이트큐브
▶리알 “‘KV256’이라는 작품은 브라질 밖에선 그동안 전시된 적 없던 작품이에요. 미국 메트로폴리탄이나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같은 유명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던 작품이죠.”


“시대를 앞선 예술가…여전히 현대성 지녀”

-파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나요

▶리알 “예술가 그 이상이죠. 1960년대 권위주의 정권으로 많은 예술가가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주하는데도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고국에 남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론 미술학도였던 2000년에 포르투갈에서 직접 파페를 만났는데, 그 후 예술가의 꿈을 접고 그를 알리는 데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리지아 파페, KV 256. /화이트큐브
-파페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의 예술세계가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페로 “파페는 시대를 앞선 예술가예요. 1960년대 작품에서 이미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적 개념들이 보이거든요. 2024년을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훨씬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탐구해온 여성 예술가가 있다는 게 놀라워요.”

▶리알 “인상적인 건 파페는 페미니스트를 주제로 기획된 전시에는 참여를 거부했단 거예요. 특정한 틀에 갇히는 걸 원치 않았던 거죠. 정치적 개념이나 메시지가 작품에 들어가 있지만, 항상 시적으로 표현했단 점도 특별하고요. 그의 작품이 여전히 현대성을 갖고 있는 이유죠.”

빛과 선으로 소통한 예술가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200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게 한 테테이아 연작이다. 전시장엔 ‘테테이아 1, B’(2000)이 설치됐다. 팽팽하게 당겨진 금색 실을 교차시킨 빛의 기둥으로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선의 기하학적 짜임이 돋보인다.
화이트큐브 서울에 설치된 리지아 파페의 ‘테테이아 1, B’(2000)’ /화이트큐브
-전시 관람객을 위해 파페의 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리알 “저는 선(Line)으로 할래요”▶페로 “선도 맞지만, 저는 빛(Light)으로 할게요. 뭐가 더 어울리는지는 관람객들이 골라주세요.”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