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는 우주만큼 시커멓고, 눈 시릴 듯 빛날 수도 있다
입력
수정
김시영 이상협 기획전조선의 달항아리는 미술 컬렉터들한테 '1순위 매물'로 꼽힌다. 지난해 세계 양대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약 60억원에, 소더비에서 47억원에 낙찰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소박한 형태가 뽐내는 한국적인 멋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검고 뜨거운 차고 빛나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서 5월 3일까지
'소장 욕구' 불러일으키는 흑백의 정반합
김시영, 고려시대 '흑자' 계승한 '검은 달항아리'
이상협, 수만번의 망치질 끝 완성한 '은 달항아리'
김시영·이상협은 세계적 관심을 불러모은 달항아리를 재해석했다. 두 장인의 달항아리는 '백자(白磁)'가 아니다. 검고 뜨거운 '흑자(黑磁)'이고, 눈이 시릴 듯 반짝이는 ‘은(銀) 달항아리’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검고 뜨거운 차고 빛나는'은 김시영의 흑자 21점과 이상협의 은자 8점을 한 번에 감상할 기회다. 정영목 미술비평가(서울대 명예교수)는 "흑과 백이라는 단색조의 미감으로 두 작가를 서로 떠받쳐주는 정반합의 어울림"이라고 평가했다.
고려시대 '흑자' 계승한 '검은 달항아리'
'화염의 연금술사'로 잘 알려진 김시영은 국내 유일의 흑자 도예가다. 고려시대 이후 명맥이 끊긴 전통 흑자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화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1988년부터 다양한 흙과 불의 조합을 실험한 그의 작품 세계는 최근 덩어리진 질량을 강조한 추상 조각에 이르고 있다.작가는 일본에서 서도가로 활동하던 선친 밑에서 먹을 갈며 자랐다. 이런 그에게 검은색과 흑자(일본의 '천목')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선 절멸되다시피 한 흑자가 일본과 중국에서 여전히 전승되는 것을 보며 도전 의식을 느꼈다. 고려시대 가마터에 흩어진 흑자 파편의 매력에 빠진 그는 오묘한 '검은 색감'을 되살리고자 전국의 흙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일반적인 장독대의 검은 옹기와는 다르다. 1320~1450℃ 고온의 가마에서 구운 그의 작품들은 금빛부터 청록색, 핑크톤까지 화려한 장식미를 뽐낸다. 흙과 유약의 종류와 배합 정도, 가마 속 위치에 따라 변화무쌍한 '요변(窯變·유약의 변색)'의 시행착오를 오랜 세월 체득한 결과다.작가는 흑자를 굽는 과정을 두고 "흙 속 다양한 광물질을 깨우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에는 '행성(Planet)'이란 이름을 붙였다. 흙과 불이 만나 탄생한 우주를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다.달항아리의 넉넉한 공간감을 본뜬 'Planet TL 1'이 대표적이다. 지구 표면처럼 일렁이는 물결무늬와 청동을 주조한 듯한 청아한 메탈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쪽 면이 주저앉은 비정형의 형태가 눈에 띄는 'Planet MM 002'에선 오래된 운석 같은 세월의 정취가 느껴진다.최근 김시영의 관심사는 달항아리의 은유 버전인 '행성 메타포(Planet metaphor)'로 나아가고 있다. 일명 '입 없는 도자기'로도 불리는 근작들은 항아리의 실용적 특성을 넘어, 자유롭게 변주한 추상 조각에 가까워진 형태다. 작가는 덩어리진 질감에 인간에 신체 이미지를 결합하거나 일그러진 형태마저 작품으로 승화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수만번의 망치질로 완성한 '은 달항아리'
김시영의 흑자가 흙과 불을 통해 다채로운 빛깔을 구현했다면, 이상협의 달항아리는 값비싼 은에서 물 흐르듯 고요한 멋을 찾는다. 작가의 주요 개념은 '흐름(Flow)'이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물성을 흘러내리고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으로 재해석했다.금속공예를 전공한 이상협은 지난 17년간 영국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와 협업할 정도로 실력 면에서 인정받은 장인이다. 해외에서 차별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찾다 보니 한국의 전통적인 은자 달항아리에 이르게 됐다고. 그의 작품들은 영국 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 미국 필라델피아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무게 11㎏, 두께 5.5㎜ 은판이 달항아리의 형상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엔 지난한 노동이 수반된다. 직경 50㎝가 넘는 틀을 잡는 과정만 수만번의 망치질이 필요하다. 항아리 주둥이를 좁히고, 구의 어깨 볼륨을 낮추는 등 작가만의 비율과 미학을 덧입힌 끝에 최근의 '달(Moon)' 연작이 탄생했다.작품명 '달'이 암시하듯 이상협의 작품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달의 모양을 형상화했다. 관람자가 감상하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반사광을 비추면서다. 수천번의 해머링으로 반들거리는 표면을 부각한 작품부터 수백개의 수직 줄무늬로 흘러내리는 어깨선을 강조한 '독(Dok)'까지 다양하다.
독성에 예민한 은의 특성상 쉽게 변질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변색 흔적마저도 작품을 한층 멋스럽게 가꾼다. 실제로 이상협의 작품을 수집한 컬렉터 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색이 바란 흔적을 자연스럽게 간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한때 금보다도 귀한 대접을 받았던 은의 태생적 물성 때문일까. 순백의 광채를 뽐내는 은 달항아리는 별다른 장식 없이도 보는 이를 현혹한다. 조정아 갤러리밈 큐레이터는 "당초 이상협의 은자를 창문으로 뚫린 전시장 1층에 전시할까 고민했으나, 도난 위험을 염려해 5~6층으로 옮겨 전시했을 정도"라고 했다.전시는 5월 3일까지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