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으로 시작한 실리콘밸리 한인 모임 이젠 1000명 [최진석의 실리콘밸리 줌인센터]
입력
수정
"올해 더 많은 모임으로 한인 생태계 확장"
‘실리콘밸리 줌인센터’는 이 지역의 창업자, 최고경영자(CEO), 엔지니어, 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물을 ‘줌인(zoom in)’해 그들의 성공, 좌절, 극복과정을 들여다보고 지역의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봅니다. 앞으로 줌인센터에 가능한 많은 주민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올해 초 글로벌 산업계의 시선이 쏠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 2024’. 그런데 이 행사의 마지막 날인 지난 1월 12일 라스베이거스에 실리콘밸리와 관련된 한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최대 규모의 한인 커뮤니티인 ‘82스타트업’ 행사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인 창업자·투자자, 엔지니어는 1000여명. 역대 최대 규모의 참석인원에 업계 안팎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행사를 주최한 건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프라이머사제. 김광록 대표는 이 회사의 미국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2002년 UC버클리대에 유학을 오며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김 대표는 스타트업 창업을 거쳐 VC로 거듭나면서 지역 한인 네트워크의 단단한 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 대표가 그리는 82스타트업과 프라이머사제의 미래를 들어봤습니다.Q.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A. 이기하 대표와 함께 프라이머사제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한국인, 한국계 미국인 등 한국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얼리스테이지 VC입니다. 한국에서 연세대학교 건축학과(94학번)를 졸업한 뒤 2002년 미국 UC버클리로 유학을 왔습니다. 대학에서 만난 이기하 대표와 2005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엔 한인 창업자는 물론 빅테크에 일하는 한인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창업해 사업을 꾸려왔고, 이후 프라이머사제를 설립해 투자에 나섰습니다.
Q. 창업했던 기업은 어떤 것이었나요?A. ‘딜스 플러스’라는 이름이 사업이 잘 됐습니다. 웹 2.0을 쇼핑 쪽으로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쇼핑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플랫폼입니다. 고객별로 커스터마이즈해서 웹사이트나 소셜미디어(SNS)에 좋은 딜이 나오면 소개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시장만 겨냥해서 론칭했는데 2012년 한 달에 1000만명이 들어오는 플랫폼으로 성장했습니다.Q. 투자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A. 2010년부터 스타트업과 만났고 2014년부터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약 4년간 총 60개 스타트업에 총 600만달러(78억원)를 투자했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LP 출자도 했습니다. ‘벤처캐피탈을 직접 해보면 의미가 있겠다’라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가 자금조달을 통해 스타트업에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18년부터입니다. 창업 성과에서 비롯된 자신감으로 한인 스타트업에 투자하면 우리가 와이컴비네이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Q. 최근 투자 사례로 어떤 스타트업이 있나요?
A. 닥터나우와 업스테이지, 지구인컴퍼니 등이 있습니다. 업스테이지는 네이버 출신의 김성훈 대표가 설립한 AI 스타트업입니다. 대규모언어모델(LLM) 솔라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 대표가 열심히 뛰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Q. 2018년에 ‘82스타트업’도 시작했습니다.A. 한인들이 서로 돕고자 하는 니즈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결고리는 없었죠.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 이스라엘인들의 유대감은 상당히 강합니다. 이에 비해 한인들은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걸 잘 채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브런치 먹으면서 서로 푸념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나 이야기해보는 모임으로 시작했습니다. 9명이 모였죠. 한 두 달에 한 번씩 작은 모임을 했습니다. 이듬해인 2019년에는 특별한 어젠다가 있을 때마다 모였습니다. 2020년 1월엔 300명이 모였습니다. 작년에는 700명이 행사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1000여명이 몰렸습니다.
뉴욕 총영사관에서 작년 1월에 82스타트업 행사에 참석한 뒤 ‘동부에서도 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그래서 작년 10월에 뱅크오브어메리카(BOA)의 지원을 받아서 ‘코리아 스타트업 네트워크’를 개최했고, 매년 정례화하기로 했습니다. 올해도 9~10월에 열 예정입니다.
오는 6월에는 처음으로 바이오 행사를 개최합니다. ‘K바이오 X’ 행사입니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장 많이 바뀌는 분야가 바로 바이오입니다. 이전까진 돈과 인재가 많이 들어가는 고비용 산업이었습니다. 이젠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성장 잠재력이 큰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Q. 올해 82스타트업의 행보가 더 활발해지는 것 같습니다.
A.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라는 말이 있듯이, ‘나+환경+사람들=지금의 성과’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감사하게 받았으니 되돌려줘야죠.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과 일하면 안 된다’, ‘한국 사람 믿으면 안 된다’.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이 주를 이루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실리콘밸리의 한인 생태계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Q. 프라이머사제 대표로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A. 2018~2020년까지 4300만달러를 목표로 한 1차 펀드를 조성했고, 2021년부터 지금까지 두 번째 펀드를 1억3500만달러 규모로 조성해 운영 중입니다. 올해 말부터 2억달러 규모의 3차 펀드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프라이머사제의 특징은 VC 출신이 없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시도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1) 펀드’ 전략을 씁니다. 다른 곳은 작은 펀드 여러 개를 운영하는데 우리는 한 펀드에서 투자금이 나가게 합니다. 투자 전략을 세울 때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3차 펀드부터는 바이오 분야에 무게를 두고 투자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Q.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어떤 점을 느끼나요?
A. AI가 세상을 잡아먹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국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의대’ 선호 현상이 짙습니다. 한국의 많은 분들이 보다 다양한 것들을 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취업용, 스펙용 창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잠재적 경쟁자’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협력자’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도 개선됐으면 합니다.
Q. 후배 스타트업 대표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사람과 열정’,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람과 열정이 중요하다는 건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의 스타트업 대표 중에 미국 시장 진출을 타진하는 이들이 많은데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미국 시장이 한국시장보다 더 어렵습니다. 미국엔 더 강력한 경쟁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사업을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다면 정말 ‘올인’하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또한 스타트업 대표들은 대부분 욕심이 많습니다. 성취 동기가 강하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스타트업은 많은 부분이 부족합니다. 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은 건 알지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초창기일수록 더욱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문제점이 있는데 내가 잘 해결할 수 있고, 타이밍도 좋은 것에 에너지를 쏟기를 바랍니다.
실리콘밸리=최진석 특파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