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릴 먹여살렸는데…무겁고 더럽다고 버릴 순 없잖아요"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는 에너지 분야 소식을 국가안보적 측면과 기후위기 관점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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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국이 철강·시멘트·석유화학 등의 탈탄소화에 시동을 걸었다. 이들 기업은 전기화가 힘든 650도 이상의 고온 공정이 필요한 중후장대 산업에 속한다. 화석연료 연소가 필수적인 제조 공정으로 인해 각국의 탄소배출량의 평균 20~25%를 차지하고 있다.하지만 탄소중립의 마지막 관문으로 통한다. 탄소 감축 기술 개발이 더딘 탓이다. 최근 미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자국 경제의 성장 기반이었던 중후장대 산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청정화를 돕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보조금 쏟아내는 美…이번엔 산업계 탄소 감축에 쏜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말 산업계의 탄소중립 기술에 총 60억달러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미 에너지부 산하 '청정 에너지 실증 사무국(OCED)'이 20개 주에 걸쳐 33개 기업들의 탄소 감축 프로젝트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면서다. 지원금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초당파적 인프라법 제정으로 받은 산업 실증 프로그램에서 마련됐다.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사진)은 "다양한 공장과 산업 플랜트의 배출을 억제하는 방법을 테스트하기 위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산업 탈탄소화 투자를 단행한다"고 말했다. 이어 "빠르게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탄소 저감 기술을 미국에서 시연해 전 세계의 청정 기술 제조를 위한 새로운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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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5억달러를 각각 지원받게 될 기업 5개 중에 유럽계가 3곳이다. 이들 기업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 규모에 상응하는 자본을 투자하기로 했다. 스웨덴 철강업체 SSAB, 독일 시멘트 제조사 하이델베르크 머티리얼즈는, 프랑스 건자재 기업 비카 등이 대상이다. 이들은 수소환원공정, 탄소포집저장(CCS), 산업용 히트펌프, 열배터리, 전기로 등을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비카는 시멘트 제조 공정에 화석연료를 연소하는 대신 피스타치오 껍질 같은 농업 부산물(바이오매스)을 연료로 쓰겠다는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지원금에서 청정 수소 관련 기술에만 총 16억달러가 들어간다"며 "IRA에 따라 이미 ㎏당 최대 3달러의 세금 공제 혜택을 받게 될 청정 수소 부문의 성장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라고 전했다.

중화학 기업들이 대부분이지만, 소비재 기업들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식품 제조업체 크래프트 하인즈는 마카로니 생산 공정에 전기 보일러와 히트펌프를 설치해 마카로니 건조에 필요한 고온의 열을 공급받을 계획이다. 이번 정책에선 보조금 지급과 별도로 연방 정부 기관들이 저탄소 산업 자재 시장을 형성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다소 비싸더라도 청정 기술 기반의 철강, 시멘트, 유리 등을 구매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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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계의 탄소 감축 기술 '저렴화'에 베팅하는 독일

미 정부의 정책 도입 배경에 대해 한 전문가는 "산업 분야는 풍력·태양광, 배터리 등 화석연료 발전에 대한 대안 기술이 널리 보급돼 비용이 많이 낮아진 전기 분야와는 다르다"며 "충분한 가격 경쟁력을 가진 승자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비영리단체 클라이밋웍스의 레베카 델 책임자는 "산업계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신기술들은 벤처캐피털(VC)이 투자하기엔 너무 비싸고 투자은행이 프로젝트 파이낸싱(대출)을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며 "이번 정책은 그 중간 단계에 있는 신기술들을 상업적 규모로 발전시키는 데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전기화'가 가능한 내연기관차와 발전 부문의 탄소배출량에 대해선 앞다퉈 엄격한 제한을 둔 편이지만, 산업계의 탄소 배출을 단속하는 것은 꺼렸다. 그만큼 탄소 감축이 어려운 분야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는 '섣불리 규제에 나설 경우 이들 기업이 규제가 느슨한 해외로 공장을 이전해버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들의 탄소 감축을 단속하기 보다 지원에 방점을 뒀던 미국 정부가 이번 보조금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탄을 보급한 것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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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지난달 최대 230억유로에 달하는 보조금이 투입될 '기후 보호 계약' 정책을 발표했다. 중후장대 기업들이 기존 화력 공정에 비해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청정 기술을 사용할 경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보전해준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정책 구조는 각국 정부가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보급을 지원하기 위해 활용한 차액결제거래(CfD) 방식과 유사하다.

독일은 산업계의 탄소 배출 감축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보통신(IT), 인공지능(AI) 등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 미국과 달리 여전히 자동차, 철강, 화학 등 중후장대 산업이 국가 경제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독일이 자국의 핵심 먹거리인 에너지 집약 산업의 기반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실험적인 정책을 도입했다"고 전했다.

독일 정부가 해외 기업의 입찰 참여를 제한한 것도 산업 보호 목적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독일 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이제 (모든 나라가) 탄소중립에 관한 모든 논쟁에서 '산업의 에너지 소비에 관한 관점'이 훨씬 더 중요해지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며 "이번 정책으로 독일의 산업 기반을 안정시키고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