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한 줌, 뼈 한 조각이라도" 아직도 오지 않은 4·3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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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추념일 찾은 유족들, 정치권에 "완전한 해결" 주문
"4·3 당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흙 한 줌, 뼈 한 조각이라도 되찾고 싶습니다. " 제76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고은봉(69)씨는 한(恨)을 토해냈다.
고씨는 "4·3 당시 토벌대가 마을을 급습했을 때 할아버지가 뒷산 숲속에 숨어있다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을 마음대로 묻지도 못하던 때라 어딘가 몰래 묻었다고 들었다"며 "할아버지와 같이 있던 작은아버지는 토벌대에 끌려가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고씨의 작은 아버지는 지난해 5월 75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는 "작은아버지가 무죄를 선고받아 후손으로서 더없이 기쁘지만,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해 가슴 한편은 찢어질 듯 미어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씨는 총선을 앞두고 추념식에 참석한 정치인들을 향해 "여전히 4·3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며 "찾지 못한 1만명 넘는 희생자의 시신이라도 찾아 마지막 한까지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궂은 날씨에도 유족들은 위패봉안실을 찾아 헌화와 추념했다. 위패봉안실 내 4·3 희생자 무명신위를 찾는 발길도 드문드문 이어졌다.
4·3희생자 무명신위는 4·3 당시 희생됐지만 7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름도, 유해도, 기록도 확인되지 못해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가 지난 3월 설치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은 2만5천명∼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희생자로 결정된 이는 1만4천822명에 그친다. 이날 위패봉안실 인근 외부에 마련된 행방불명인 묘역에도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엔 제수를 든 유족 발길이 이어졌다.
당초 예보와 달리 강한 비바람은 치지 않았지만, 밤새 내린 비에 땅은 질퍽했다.
유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를 땅에 맞대며 절을 올렸다.
안개가 짙게 끼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씨 속에서도 예년과 달리 추념식 날을 기다려 만개한 왕벚꽃이 유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했다.
유족 현종학(71·제주시 함덕면)씨는 부모님과 고모와 함께 큰아버지 현덕홍씨 비석을 정성스레 닦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아버지는 선거를 반대하고 다음 날 집 토굴에 숨어 있다 토벌대에 붙잡혀 갔다"며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했던 큰아버지는 가족이 4번째 면회를 하러 갔을 때는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념식 다음 날인 4월 4일 현씨 큰아버지는 직권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으며 명예를 되찾았다.
그는 "제주는 4·3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다른 지역에서는 4·3이라 하면 '빨갱이'라는 인식을 많이 한다"며 "개인이 설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국가적으로 4·3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dragon.
/연합뉴스
"4·3 당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흙 한 줌, 뼈 한 조각이라도 되찾고 싶습니다. " 제76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을 찾은 고은봉(69)씨는 한(恨)을 토해냈다.
고씨는 "4·3 당시 토벌대가 마을을 급습했을 때 할아버지가 뒷산 숲속에 숨어있다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을 마음대로 묻지도 못하던 때라 어딘가 몰래 묻었다고 들었다"며 "할아버지와 같이 있던 작은아버지는 토벌대에 끌려가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고씨의 작은 아버지는 지난해 5월 75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는 "작은아버지가 무죄를 선고받아 후손으로서 더없이 기쁘지만,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해 가슴 한편은 찢어질 듯 미어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씨는 총선을 앞두고 추념식에 참석한 정치인들을 향해 "여전히 4·3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며 "찾지 못한 1만명 넘는 희생자의 시신이라도 찾아 마지막 한까지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궂은 날씨에도 유족들은 위패봉안실을 찾아 헌화와 추념했다. 위패봉안실 내 4·3 희생자 무명신위를 찾는 발길도 드문드문 이어졌다.
4·3희생자 무명신위는 4·3 당시 희생됐지만 7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름도, 유해도, 기록도 확인되지 못해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가 지난 3월 설치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은 2만5천명∼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희생자로 결정된 이는 1만4천822명에 그친다. 이날 위패봉안실 인근 외부에 마련된 행방불명인 묘역에도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엔 제수를 든 유족 발길이 이어졌다.
당초 예보와 달리 강한 비바람은 치지 않았지만, 밤새 내린 비에 땅은 질퍽했다.
유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를 땅에 맞대며 절을 올렸다.
안개가 짙게 끼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씨 속에서도 예년과 달리 추념식 날을 기다려 만개한 왕벚꽃이 유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했다.
유족 현종학(71·제주시 함덕면)씨는 부모님과 고모와 함께 큰아버지 현덕홍씨 비석을 정성스레 닦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아버지는 선거를 반대하고 다음 날 집 토굴에 숨어 있다 토벌대에 붙잡혀 갔다"며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했던 큰아버지는 가족이 4번째 면회를 하러 갔을 때는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념식 다음 날인 4월 4일 현씨 큰아버지는 직권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으며 명예를 되찾았다.
그는 "제주는 4·3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다른 지역에서는 4·3이라 하면 '빨갱이'라는 인식을 많이 한다"며 "개인이 설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국가적으로 4·3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dragon.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