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지마요, 인간 보라고 만든 게 아니라 영혼을 위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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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키메라는 얼굴은 사자, 몸은 양, 꼬리는 뱀의 형상을 한 괴수다. 그가 등장하는 것은 불길한 사건 사고를 예견하는 것으로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는 유물을 도굴하는 아르투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낮과 밤, 도시와 시골의 경계 사이를 탐구하는 고고학적 결과물이다.
영화 리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의 고고학적 상상력
, 로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 신작
이젠 더 이상 현실 속 존재가 아니라고 믿게 된 키메라가 과거의 유물로 등장하여 세상 곳곳을 누비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불길한 조짐에 대한 감독만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감독의 어릴 적 경험담이 반영된 <키메라>의 어둡고 깊은 세계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본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로르바케르 감독이 떠올린 이야기
영국에서 온 도굴꾼 아르투는 땅속의 유물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고고학을 전공했지만 사랑했던 연인 베니아미나를 먼저 떠나보낸 뒤 그녀의 고향에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오래된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되었다. 이들이 도굴하는 유물들은 과거 일반 서민들이 사용했던 장식품과 생필품이 전부지만 아르투는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만족한다.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대의 사원을 발견한 아르투와 마을 청년들은 곧바로 출동한 경찰들을 피해 신상의 머리만 들고 황급히 도망친다. 대신 거물들을 상대하는 큐레이터가 신상(神像)을 손에 넣지만 아르투와 마을 청년들은 자신들이 먼저 발견한 신상을 되찾기 위해 그녀를 찾아간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어릴 적 마을에서 유물을 도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했다. 그 도굴품들을 비싼 값에 유명 박물관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겨지지 않는 비밀이었다. 주로 밤에 일어나는 일들을 소문으로만 전해 들은 감독에게 도굴꾼의 세계는 그 자체로 모험이자 범죄, 또 하나의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였다.이 이야기를 감독이 떠올린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였다.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게 점쳐지던 시기, 감독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 짓고자 했다. 현재의 무엇이 그녀를 어린 시절로 회귀하도록 만들었을까? 미래의 무엇이 그녀에게 오래된 유물을 도굴하는 자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을까?
도굴과 고고학, 역사학의 상관관계
영화의 첫 시작, 도굴하다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야 했던 아르투는 마을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유난히 콧대가 높은 여인들을 만난다. 마치 고대 유물에서 등장했을 법한 여인들의 모습에 아르투는 자신의 옛 연인을 떠올린다. 이들은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후예로서 이탈리아반도에 로마인들보다 앞서 존재했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민족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특징은 높은 콧대와 짙은 눈썹인데 고대 회화 속에서 이들의 모습을 다수 엿볼 수 있다. 로마의 이탈리아 지배 이후 아트루리아인들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현재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흔적만 희미하게 만날 수 있을 뿐이다.에트루리아인들에 대한 감독의 은유는 고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현재의 유일한 흔적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아무리 그들의 땅을 빼앗고 존재를 희석시켰다 할지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존재감을 곳곳에 드러내며 과거의 시간들을 회귀하고 있다.
유물은 에트루리아인들처럼 과거를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다. 아무리 누군가 과거를 지우고 삭제하려 한다 해도 유물이 발견되는 이상 우리는 과거를 지울 수 없다.
유물에 담긴 자본주의 시대의 탐욕
문제는 이러한 과거의 회귀가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생한다는 데 있다. 아르투와 마을 청년들은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유물들을 발굴해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아르투를 짝사랑하던 이탈리아가 유물을 도굴하는 이들을 향해 “그건 인간이 보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혼령을 위한 거죠”라며 소리친 것은 참으로 옳다. 죽은 이들과 함께 매장된 물건들은 현세의 것이 아닌 저승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이 다시 현재로 회귀되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기에 불법인 셈이다. 아르투는 도굴꾼들과 함께하지만 과거 고고학자였고 여전히 유물들을 애정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에게 과거는 곧 현재적 사건이며 지속되는 순간들이다. 감독은 이런 아르투를 통해 과거의 시간조차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현 체제의 냉혹한 야만성을 폭로한다.신전에서 발굴한 신상을 두고 서로 자신의 것이라 다투는 큐레이터와 마을 청년들의 모습이 아르투의 시선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시선으로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 신화 속에 존재했던 키메라의 현존일지도 모르는 이들의 탐욕이 아르투의 눈앞에 서슬 퍼렇게 재현된 것이다.
과연 이 시대의 키메라는 누구인가?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감독은 왜 어릴 적 들었던 도굴꾼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을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 불안한 미래를 연결 짓도록 만들었을까? 어쩌면 키메라처럼 과거의 전설 속에 존재했던 괴수가 지금 이곳에,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 회귀의 순간들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팬데믹으로 텅 비어버린 도시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던 야생동물들의 이미지를 통해서 어쩌면 에트루리아들을 점령한 로마인들처럼, 또 그들을 점령한 기독교 문명, 서유럽 국가들,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이어지는 모든 역사의 파편들 위에 바로 나 자신이 서 있음을 자각한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무덤을 밟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현재에서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품을 수 있을까? 감독은 이 질문들의 답을 이탈리아를 통해 제시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해 보길 바란다. /이동윤 영화평론가 ▶▶▶[관련 칼럼] 어둠과 죽음과 지하에서 구원과 생명과 초월을 끌어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