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9.6조 역대급 '잭팟'…그 뒤엔 사우디의 '변심' 있다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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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총 72억달러(약 9조6000억원)짜리 역대급 수주에 성공한 배경에는 사우디의 '변심'이 자리잡고 있다. 사우디는 막대한 석유·천연가스전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석유 수출에만 집중해왔다.러시아 전쟁 이후 사정이 급변했다. 세계 각국은 천연가스를 에너지 전환과 안보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가교 연료'로 추켜세웠다. 이에 석유 수출 일변도의 경제 구조를 다각화해야 하는 사우디도 작년부터 천연가스에 대한 베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3일 삼성E&A(옛 삼성엔지니어링)와 GS건설은 사우디에서 발주한 72억달러 규모의 '파딜리 가스플랜트 증설 프로그램' 공사를 따냈다고 발표했다. 한국 기업이 따낸 사우디 건설 사업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삼성E&A는 가스처리 시설 및 부대시설을 건설하기로 했다. 이 회사가 따낸 수주액은 60억달러에 달한다. GS건설은 12억달러 규모의 황회수 처리시설 공사를 맡는다. 황회수 처리시설은 가스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황을 포집하고 재활용하는 설비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보유한 파딜리 가스 플랜트는 사우디의 천연가스 확장 계획의 핵심 시설이다. 해상(하스바)·육상(쿠르사니야)의 '비연계 가스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를 처리 및 정제하는 사우디 최초의 가스 플랜트다. 비연계 가스전은 석유와 동시에 생산되지 않는 독립적인 가스 매장층에서 추출되는 가스전을 의미하는데, 가스 추출 및 처리 과정에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한국 플랜트 기업들의 추가 수주 가능성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사우디가 천연가스 시장에 대한 베팅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람코는 2020년 자푸라 가스전 개발에 1100억달러를 투자해 "향후 10년 안에 천연가스 생산량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리고, 사우디를 사상 처음으로 천연가스 수출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자푸라 가스전 역시 추출 및 처리 과정에서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비전통(셰일가스 등이 대표적) 비연계 가스전'이다.

추출된 가스는 액화천연가스(LNG) 형태로 수출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아람코가 지난해 10월 미드오션 에너지가 추진하는 호주 LNG 프로젝트의 지분을 인수한 것도 사우디의 글로벌 LNG 산업에 대한 사상 첫 투자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아람코와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국영 석유기업 애드녹은 미국 LNG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위해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람코는 텍사스에 기반을 둔 셈프라 인프라의 포트아서 LNG 프로젝트 2단계에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연간 1350만t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포트아서의 LNG 생산량 중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아부다비 애드녹은 미국 넥스트디케이드사와 손을 잡고 180억달러 규모의 리오그란데 LNG 수출 터미널에 대한 출자를 고심하고 있다. 로이터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핵심 축인 중동 산유국들이 에너지 전환 국면에서 석탄과 석유의 뒤를 이어 3세대 화석연료가 된 천연가스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동발 LNG 플랜트 및 운반선 등에 대한 발주가 잇따를 것으로 전망되는 대목이다.LNG 수요는 2030년까지 현재보다 5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에 미국 내에서의 LNG 생산량은 향후 4년간 거의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지만, 미국 LNG 기업들은 환경단체 압박과 최근 조 바이든 행정부의 신규 수출 중단 조치 등으로 인해 프로젝트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리스타드에너지의 카우샬 라메시 LNG 부사장은 "중동의 오일머니가 ESG 기조, 미국 정부 조치 등으로 LNG 투자에서 몸을 사리는 미국 은행들의 자본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람코는 최근 싱가포르 LNG기업 파빌리온 에너지의 인수전에도 참여해 최종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