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과연 예술가의 창작력까지 대체할 수 있을까?

[arte] 서진석의 아트 앤 더 시티
예술은 물리적으로 어디에서 발현이 되는가? 상식적으로 예술은 작품이라는 물질적 대상(Atom)에서 발현이 된다. 적어도 19세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같은 작업을 보면서, 우리는 그 작품을 통해서 미적 아우라에 감응하게 된다.
Fountain, 1950 (c)philadelphia museum
20세기 초반, 마르셀 뒤샹은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을 창조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의 창조는 유형의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뒤샹은 1917년에 <샘>이라는 작업을 발표했다. 일반 가게에서 구입한 하얀색 변기를 뒤집어 놓고, 하단에 'R. Mutt'라는 무명작가의 사인과 ‘샘’ 이란 작품제목을 써놓는다. 뒤샹은 'R. Mutt' 라는 이 가상작가를 옹호하는 글을 다다이즘 잡지 <The Blind Man>에 투고했다.

“작가인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작가의 새로운 생각과 목적에 의해 예술품으로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작업을 ‘개념미술’이라고 칭한다. 이제는 작품만이 아닌 작가의 개념적 의지로부터 예술은 그 물리적인 발현을 시작한 것이다.
John Cage (c)나무위키
플럭서스 운동의 리더였던 존 케이지는 1952년 <4분33초>라는 실험 음악을 공연하였다. 그가 작곡한 <4분 33초>의 악보에는 TACET(조용히)이라는 글만 쓰여 있었고, 오선지에는 음표가 하나도 없었다. 케이지는 많은 청중이 있는 공연장에 입장을 한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4분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바로 퇴장을 해버렸다.이후 그는 항의하는 청중들에게 말한다. “공연장의 연주자와 관객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나의 음악입니다. 관객이 기침하고, 옆 사람과 속삭이고, 투덜대기도 하고, 팸플릿을 넘기기도 해요. 그 모든 소리가 ‘4분 33초’ 동안 음악이 되는 거예요”. 이제 예술은 작품, 작가, 대중에 의해 물리적으로 발현되게 되었다. 이제는 예술창작에 대중의 역할이 부여되며, 소위 말하는 ‘상호작용 예술(Interactive Art)’이 시작된 것이다.

21세기, 디지털 기술혁명은 사회의 질서, 제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조차도 변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인간은 기계와 융합되며 ‘포스트 휴먼’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예술창작에도 기계의 역할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미디어 아티스트인 호추니엔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아시아 사전>이라는 작업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온라인의 바다에서 동양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인공지능에게 끊임없이 수집하게 하며 사전을 만드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제미마 와이먼(Jemima Wyman), 미디엔그룹 비트닉(!Mediengruppe Bitnik) 등 많은 콜렉티드 그룹들이 AI를 그들의 작업에 흡수하여 기계와 인간 간의 공유, 협업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바야흐로 이제 예술은 작품, 작가, 대중뿐만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도 물리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c)gettyimagesbank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였고, 디지털 혁명 시대에는 기계에 의해서 번역, 글쓰기 등과 같은 지식 노동력이 대체되고 있다. 심지어 AI 기술의 광속 발전은 감정과 감성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력까지 기계가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미래를 우리에게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미래의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그 주체성을 유지 할 수 있을까?"

예술은 과학이나 물리학처럼 답을 제시하는 학문은 아니다. 다만 예술은 그 본분인 사회와 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계속 하면서, 그 어떤 두려운 미래에도 ‘인간의 주체성 유지’라는 그 명확한 대의를 상실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일까? /서진석 부산시립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