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이모'일 뿐이던 중년여성, 자기 이름을 찾다…영화 '정순'

정지혜 감독 데뷔작…주연 김금순 빼어난 연기
지방 소도시의 식품회사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중년여성 정순(김금순 분)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아줌마다. 남편을 여읜 그는 딸 유진(윤금선아)과 단둘이 산다.

공장의 젊은 직원들은 고유명사인 '정순'으로 그를 부르는 법이 없다.

이들에게 정순은 그저 보통명사인 '이모'일 뿐이다. 공장의 이모들 가운데 한 명, 그게 정순이다.

정순은 이를 조금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당하면서 자기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정지혜 감독의 신작 '정순'은 중년의 여성 노동자 정순이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돼 발버둥 치면서 자기 삶의 주체로 눈을 뜨는 이야기다.

'정순'의 미덕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데 있다.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번드르르한 서울 한복판의 선남선녀가 아니라 한적한 지방 소도시에서 자기 이름 대신 '이모'나 '삼촌'으로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향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도 공장의 생산 라인과 탈의실, 어두컴컴한 모텔 방, 정순의 자그마한 아파트 같은 곳들이다.

정순이 공장에 새로 들어온 영수(조현우)를 포함한 동료들과 휴일에 등산하고 내려와 회식하는 장면에서 보듯 '이모'와 '삼촌'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 그 밑에 숨겨진 감정에도 주목한다.

노동자를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노동 현장의 현실도 놓치지 않는다.

젊은 작업반장 도윤(김최용준)은 나이도 많은 정순에게 은근슬쩍 반말을 쓰고, 거래처 사장이 공장을 방문하는 날엔 호들갑을 떨면서 그를 보면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지시한다.
이렇게 계속 흘러갈 것만 같던 정순의 일상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으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정순이 마지막까지 자기편에 서줄 사람인 딸 유진에게 "내 일인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하느냐"며 절규하는 장면은 그가 자기 삶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산통의 순간처럼 보인다.

정순이 공장으로 돌아가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더는 '이모'가 아닌 정순으로 살 것을 선언하는 듯해 깊은 울림을 남긴다.

배우 김금순의 뛰어난 연기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브로커'(2022), '비상선언'(2022), '잠'(2023), 드라마 '카지노', 'LTNS' 등에서 조연이나 단역을 맡아 신 스틸러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금순은 주연작인 '울산의 별'(2024)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윤금선아, 조현우, 김최용준의 앙상블도 높이 살 만하다.

윤금선아는 김금순과 실제 모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실감 나게 연기한다.

'정순'은 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정 감독은 '면도'(2017), '매혈기'(2018), '버티고'(2019) 등 단편에서도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주목했다.

'정순'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해외에서도 주목받아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선 심사위원대상과 여우주연상으로 2관왕을 했다. 17일 개봉. 104분. 15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