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서 와. 고생 많았어, 여기 와서 빗소리 좀 들어봐. 굉장해”

[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피검사의 목적과 언어유희왕

피검사의 목적

건강검진 결과를 본 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항목이 있어서 동네 병원에 들러 혈액검사를 한 번 더 했습니다. 튀김, 라면, 빵, 아이스크림처럼 글자만 보아도 군침을 돌게 하는 음식을 꾹 참고 먹지 않은 지 오래이지만 어느덧 혈관 건강이 좋지 않은 아저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균형 잡힌 식습관을 지키고 운동을 열심히 병행하더라도 타고난 몸을 바꿀 수는 없으니, 처방받은 약을 열심히 복용하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조언입니다. 검사를 마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중에 오른팔 혈관에 생긴 자국을 보며 초등학교 3학년 둘째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주사 맞았어? 병원 다녀왔어? 무슨 치료를 받았어?”라며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이에 아이에게 고지혈증 진단이나 콜레스테롤 수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아빠 피검사 했어”라고만 짧게 답했습니다.그랬더니 “아빠 진짜야? 피를 검사했어? 그래서 아빠, 혈액형 뭐 나왔어?”

피검사의 목적을 혈액형 확인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인데,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혈액 검사를 하고 난 후, 아무런 걱정 없이 ‘혈액형이 무엇인지’만 확인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듣는 순간 안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목련꽃봉오리를 손에 끼운 어린이의 손 / 필자 제공
건강검진 항목의 뇌 혈류·심장초음파·뇌단층(CT)·자기공명영상(MRI)·위장내시경 등 듣기만 해도 두려움이 밀려오는 검사도 ‘키와 몸무게를 측정하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심각한 위기에 처하더라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눈으로 보듯 단순화한다면 어지간한 걱정은 훨씬 줄어들 수 있겠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덕분인지 검사 후 수개월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혈액 수치는 정상화되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를 넘어선 언어유희왕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당시 다섯 살배기였던 막내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이번 주도 태권브이(재택근무)야?”(가만히 생각해보니 은근히 발음이 비슷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편의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먹거리를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투정을 부립니다.
“아빠, 나 스핑크스(프링글스, 미국 켈로그社의 감자 과자) 하나도 못 먹었어. 언니랑 오빠가 다 먹었어”

아이의 언어를 통해 일종의 애너그램(Anagram, 語句轉綴 어구전철_단어나 문자를 재배열해서 다른 뜻으로 만드는 언어유희)을 본 것처럼 큰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에서,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애너그램과 암호 풀이가 있었지만, ‘태권브이’와 ‘스핑크스’는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저는 직업적 특성상 언어유희를 한껏 발휘해야만 하는 역량이 필요한데, 때때로 아이들로부터 기발함을 얻고 있습니다.
숲을 체험하는 어린이의 손 / 필자 제공
‘사권의 지평선’이라는 단어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과학자들이 주로 블랙홀의 경계면에 관해, 그 내부에서 발생된 빛을 비롯해 어떠한 정보(사건)도 관측할 수 없다며 이를 ‘사건의 지평선(이벤트 호라이즌)’이라 명명했습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과학 개념이지만, 명확하게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를 흥겨운 노랫말과 가락으로 풀어낸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음악이 나오자 멀게만 느꼈던 과학용어조차 매우 친숙해졌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어느 날,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둘째 아이의 수첩을 읽다가 ‘사권의 지평선’이라고 쓴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평소에 “어른이 되면 나사(NASA, 미국항공우주국)에서 일하고 싶다”며 꿈을 밝혀 왔는데, 아마도 우주에 대한 단어도 담아 두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실수로 틀리게 써놓은 ‘사권의 지평선’은 ‘사건의 지평선’보다 훨씬 깊게 새겨졌습니다.그 이후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꽂이를 볼 때마다 그때의 그 단어가 떠오릅니다. 책 4권이 기막히게 수평을 이룰 때마다 어느새 머릿속으로는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하가 부른 곡 ‘사건의 지평선’이 배경음악으로 맴돕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스승

오래된 저녁 약속이 있던 날. 이미 어린이들은 잠들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마침 초여름에 어울리는 보슬비가 내렸는데, 아이들은 잠들기 직전 마지막 힘을 모아 빗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에 닿는 빗방울 소리가 꽤나 매력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한마디 건넵니다. “아빠, 어서 와. 고생 많았어 (정말 이렇게 말하는 아들입니다) 여기 와서 빗소리 좀 들어봐. 굉장해”

아마도 책이나 영화에서만 묘사됐던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한술 더 떠서 “아, 좋구나. 그럼 내일 아침에 아빠가 이 빗소리를 상상하며 작곡한 음악을 들려줄게. 바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란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쑥스러움에 씻으러 가는 제게 다시 말을 잇습니다. “아빠, 아주 좋은 생각이네. 우리 내일 아침에 그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자. 우리 그 음악을 ‘알람 소리’라고 하자”

빗소리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아이들은 쇼팽의 음악을 꼭 기억하겠다며 미소 지었습니다.

하루는 영어 단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초등학생 딸이 묻습니다. “아빠, 나 ‘올(all)’을 사용해서 문장을 하나 만들 거야. 내가 만들고 싶은 문장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이 있다’야. ‘올 피플(all people)’이라고 하면 돼?”

그렇게 탄생한 문장은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Everyone has their own life)’입니다. 기초 문법책에 나올 법한 문장을 왜 떠올렸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우리 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그저 동의했을 따름입니다. 그 덕분인지, 어른인 제가 때때로 타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허무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됐습니다.
바르셀로나 호안미로 미술관 / 필자 제공
마침 당시에는 과학철학자 헬레나 크로닌이 쓴 『개미와 공작』을 비롯해 다윈주의에 기초한 진화학 서적을 열심히 읽고 있었으니 공감의 뜻을 나타내기도 수월했습니다. 딸의 영작문에 화답하듯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양성이지. 종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성. 친구와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헛된 일이지”


먹기시대를 아세요?

여행 중 이야기의 주제가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문명의 발생, 역사로 이어집니다. 큰아이가 “아 그러니까 이 도시는 청동기 시대의 모습을 간직했고. 그다음은 여기는 철기시대 유적이 있고, 그다음은… 아빠, 철기시대 다음은 무슨 시대지?” 곰곰이 생각하려던 찰나 둘째 아이가 대답합니다. “뭐긴 뭐야 먹기시대지. 아, 배고파”

겉모습만 어른으로 바뀌었을 뿐, 스스로는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걱정도 많고 조금이라도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니, 단지 아이들 앞에서만이라도 어른 흉내를 낸다고 할까요?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감동하거나 각성하게 되는 순간이 많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지금보다 한층 깊은 깨달음을 얻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고린도전서 13장 11절을 인용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7)>의 마지막 대사를 재인용 -
키재기의 흔적 / 필자 제공
물론 (어지간한 어른보다 훌륭한) 어린아이였을 때의 말과 생각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죠.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열심히 읽고 마음을 다듬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