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우주를 일기로 쓰는 돌의 사나이, 강원도에 온 우고 론디노네

뮤지엄산 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번 투 샤인'
수녀와 수도승 7점 등 국내 최대 규모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다섯 빛깔의 유리 시계가 콘크리트 건물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초침과 분침이 사라진 둥근 원판 위로 색색의 햇살이 지난다. 같은 자리에 서서 바라본 보라색 시계는 그림자를 따라 12시 30분을, 청록색 시계는 2시 40분을 가리킨다. 몇 걸음을 옮기면 그 시간은 과거가 됐다가, 미래가 된다. 일본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은 그렇게 투명한 빛과 물의 공간에서 우주의 빛으로 뒤덮인 찬란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무채색의 건축물에 색을 입힌 사람은 '불과 돌의 사나이'로 불리는 우고 론디노네(60).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그가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 '번 투 샤인(Burn to Shine)'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8일 뮤지엄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나는 마치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며 "안도 다다오라는 건축가가 만든 강건한 건축물 안에 또 다른 건축을 하는 과정은 즐거운 도전이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영상과 조각, 회화와 설치 등 그의 대표작은 물론 1000여 명의 원주 지역 어린이들과 협업해 탄생한 2000여 장의 드로잉 등이 함께 전시됐다.

"빛나기 위해 타오르라"

'번 투 샤인'은 그가 2022년 아트바젤 파리 개막 전야제에서 처음 선보인 영상 작품이다. '빛나기 위해 타오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그의 연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존 지오르노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삶과 죽음의 공존에 대한 불교의 격언이자, 더 오랜 역사를 지닌 그리스 신화의 불사조를 연상시킨다. 매번 새롭게 재탠생하는 불멸의 새는 태양과 연계되고, 전생의 재로부터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얻는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모로코 리야드 페즈 사막에서 나흘간 촬영한 10여 분 가량의 영상은 어둠이 찾아온 자정부터 동이 틀 때까지 격렬하게 춤추는 18명의 무용수, 12명의 타악주자가 연주하는 강렬한 사운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민속 악기의 향연이 연결돼 삶의 순환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관련기사] '이것은 부활의 불꽃'…파리를 달군 '불과 돌의 사나이'

무지개빛 햇살로 시작한 이번 전시는 말 조각 시리즈와 회화 시리즈인 '매티턱'으로 이어진다. 푸른 말 조각 11점엔 각각 에게해, 켈트해, 황해, 보퍼트해 등 바다의 이름이 붙는다. 미묘한 색의 차이가 말의 몸을 수평으로 나누고 있다. 벽면엔 일몰과 월출의 풍경을 3색으로 그려낸 수채화들이 함께 걸렸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유리를 주조해 만든 이 말들은 하나의 지구입니다. 바다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어요. 반으로 갈린 부분에 빛이 닿으면 환영처럼 보이는데, 아래 부분은 어둡고, 윗 부분은 밝습니다. 우주 전체를 말 안에 담고 싶었지요."

살아있는 우주를 일기처럼 쓰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자연'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로 압축된다. 낭만주의는 세기말 산업혁명으로 퍼져가던 합리성의 논리에 대항하고 인간성을 외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일몰과 별, 구름과 빛, 돌 등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의 그것들에 심취한 게 특징. 원형의 자연을 끌어들이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파리 방돔 광장에 올리브나무를 심고,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거대한 인간 형상의 돌조각을 세우고,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네온 컬러를 칠한 거대한 탑을 쌓아도, 이질적이거나 들뜨지 않는다. 문화와 국경을 뛰어넘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이라는 얘기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 '수녀와 수도승(Nuns and Munks)' 시리즈는 뮤지엄산 야외 스톤가든에 6점, 자연광이 들어오는 백남준관에 1점 설치됐다. 백남준관 안엔 4m높이의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이 시시각각 각도가 바뀌는 햇살을 마주하며 서있다. 여러 시간대에 찾아 그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천천히 감상하길 권한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원주 지역 5세~13세 아이들과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달', '세상에서 가장 큰 태양'을 그려냈다. 검정색 종이엔 달을, 하얀색 종이엔 태양을 그린 것들을 모아 각각의 전시장에 걸었다. 그는 "아이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미술관이 아이들, 모두에게 편안한 곳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우주에 관한 일기'라고 했다.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전시
"나는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계절, 하루, 시간, 풀잎 소리, 파도 소리, 일몰, 하루의 끝, 그리고 고요함까지." 전시는 9월 18일까지. 원주=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