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수난곡' 음악은 평생 곁에 두고 듣는 음악일 것 같다

[arte] 이동조의 나는 무대감독입니다
올해 마태는 음반, 공연, 생각 그리고 영화들로
– 전곡 68곡 기준
Passio Domini nostri J.C. secundum Evangelistam Matthæum

고(故)스러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마태수난곡'의 원제목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원제목의 시간인 18세기 전반을 잠시 떠올려본다. 한국에서는 1443년 창제된 한글이 백성들에게 반포되어 사용된 지 삼백 년에 이르는 시간을 포함하고 있고, 1517년 ‘종교개혁’이라고까지 불리며 마르틴 루터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한 독일에서는, 이백 년을 넘어 그 성경들이 읽히고 있었을 테고, 그 독일어 텍스트로 만들어진 찬송가들 역시 사랑받으며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 구절을 가사의 기반으로 하는 바흐의 작품 '마태수난곡'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독일인들에게는 옛글 혹은 고어라 표현되는 그런 독일어로.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 겉표지
올해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공연에 청중으로 참여할 것을 준비하며 우선 1999년 녹음된 마에스트로 필립 헤레베헤의 음반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1984년 첫 전곡 녹음에 이어 두 번째 녹음이었던 앨범은 현재 카운터테너 원톱이라는 필립 자루스키에 앞서 그 명성이 드높았던 안드레아스 숄이 참여한 앨범이기도 하다.

또한, 음반이 발매되었을 즈음 고음악 혹은 원전연주단체 연주로서 반향을 일으켰던 음반이기도 하니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공연에 참여한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가 공연 전 인터뷰에서 바흐는 목소리를 오케스트라와 대화하는 악기처럼 다룬다는 언급을 했는데, 공연에 청중으로 참여하며 그 역시 잘 확인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년 4월 첫 글에 이어 다시 한번 마태수난곡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 수난은 '사랑'의 다른 표현? - 제1부 첫 합창 그리고 제2부 첫 곡인 제30곡

'마태수난곡' 대단원의 서막을 여는 첫 합창을 잘 바라보고 있으면, 요즘 말로 ‘갑자(짜)기?’, 아님 ‘훅 들어오네’ 정도의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기-승-전-결의 서사에 ‘결’에 가까운 장면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시작한다고 하면 적절한 설명이려나. 사랑과 자애로 나무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이야기하는 대화에서 딸들은 누구를 지켜보는 것이냐고 묻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신랑’을 지켜보라고 이야기한다.곧 이어지는 두 번째 합창에서 언제나 인내로 일관하며 모욕을 참고 모든 죄를 져주신 어린 양 같은 그 신랑은 예수임을 확인해 준다. 마태복음 제26장과 제27장 성경 구절을 내용으로 하는 '마태수난곡'.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를 신랑을, 기름을 채운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명의 처녀와 그저 등만 들고 기다리는 미련한 다섯 명의 처녀들의 이야기인 <열 처녀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25장과의 연결 선상에서 온 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수난곡 전 곡에 걸쳐 첫 합창곡에만 등장하는 단어, ‘Bräutigam(신랑)’. 신랑을 기다리고 찾아 헤매는 처녀의 마음이 사랑 말고 또 무엇이 있으려나.

기독교의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 있고, 구약은 ‘아가서’를 포함하고 있다. 제6장 1절을 인용해 본다.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제2부를 시작하는 첫 곡은 위 구절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사람 간의 사랑 이야기를 관능적인 표현을 통해 여러 사랑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아가서’. 이 독특한 시선을 작곡가 바흐와 작사가인 피칸더는 제2부 첫 곡에서 음악과 가사를 통해 잘 불러오고 있다. 알토 혹은 카운터테너가 역을 맡은 화자와 합창단 간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곡의 가사를 계속 음미하다 보면, 다시 돌아가 제1부의 첫 합창 역시 ‘아가서’의 연장선상에서 그 역시 사랑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끝없는 허무를 이야기하는 듯한 ‘전도서’ 뒤에 바로 붙은 ‘아가서’. 그 구절들은 무엇이 그렇게 관능적이며 사랑적이었을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그지없이 아름답던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에 등장하는, 데보라를 사랑하는 누들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지탱해주던 그녀를 생각하며 밤마다 읽었다는 ‘아가서’의 ‘아름다운 노래’를 외우는 장면을 소개해본다.


2. '아~' 탄식의 수사법 - < Erbarme dich >

수사법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떠한 생각을 특별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기술로 표현이나 설득에 필요한 다양한 언어표현기법’

제39번 곡은 < Erbarme dich >라는 알토의 아리아이다. 바이올린 선율과 성악가가 대화하는 듯한 이 아리아는 아마 작품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래일 것이다. 바흐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비슷한 선율이 바흐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등장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품번호 제8번, 제82번, 제140번 칸타타나 다단조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번호 제1017번 등등. 이 선율은 바흐가 선호했다는 선율이기도 하고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 곧잘 등장하는 선율이기도 하다.

언어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수사학에서 < Erbarme dich >의 도입부는 ‘Exclamatio-엑스클라마티오’라 불린다. 첫 음에서 6도를 올린 후 음계적으로 천천히 하강하며 되돌아오는 모양의 이 음형은 언어에서는 감탄문에 해당하며 슬픔과 탄식의 표현에 매우 어울리는 방법이라 여겨졌다. 책상에 앉아 조금씩 소리의 강도를 높이며 탄식의 연습을 해본다. ‘아~, 아~~, 아~~~, 아~~~~’. 어떤 강도이건 볼륨 0에서 시작해 짧은 시간 가장 강한 소리에 올랐다가 잦아들며 다시 0으로 수렴하는 과정일 텐데, 수사학자들이 음악을 통해 ‘감탄’을 표현하는 방법을 탄생시키는 그 시작과 조금 닮아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리코더 연주를 만만히 보았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는 송강호 배우가 등장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 송강호 배우가 분(扮)한, 결국 자신을 태워 죽음을 맞이하는 전직 신부이자 흡혈귀인 그 주인공에게는 바흐 작품 제82번 칸타타 < Ich habe genug- 나는 편안하나이다 > 혹은 < Erbarme dich – 불쌍히 여겨주소서 > 중 어떤 곡이 더 어울렸을까? 영화 속 등장하는 리코더 연주를 소개해본다.




3. 붓점리듬 - 동요 '산토끼'의 후렴구인 '깡-총-깡-총'의 뉘앙스를 생각해보는 일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인상 깊었던 곡 중 하나는 제35곡 테너의 아리아였다. 첫 마디가 지나면 비올라 다 감바가 붓점리듬의 연주를 시작하고, 그 위로 ‘부실한 혀가 나를 찌를 때에’란 가사의 선율을 테너가 얹는다. 악기 연주자가 긁어대는 활을 듣고 보고 있자니 찰현을 통해 공연장을 부유하는 그 음악은 혹시 가학이 빚어내는 일그러진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제51곡에 이르면 벌을 받고 있는듯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 채찍질, 오! 구타여!, 오! 상처여’. 고문을 가하는 형리들에게 자비를 요청하는 가사 역시 포함하고 있는 이 서창 그리고 이어지는 알토의 아리아는 공통으로 붓점리듬을 사용하고 있다. 한 박자를 3대1의 비율로 혹은 거꾸로 1대3의 비율로 쪼개는 붓점리듬은 해맑은 토끼의 걸음과 뜀을 묘사할 수도 있지만, 예수의 맨몸에 한 줄 한 줄 선명한 핏자국을 새겨가는 그 모습 역시 잘 대변해 준다. 제51곡에서 물리적인 채찍질을 묘사하던 붓점리듬이, 전환되는 가사와 함께 알토의 아리아로 넘어가며 채찍질을 마음속으로 내면화시키는 그 광경은 마태수난곡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다.

멜 깁슨 배우가 감독, 각본, 제작을 맡아 2004년 개봉했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속에 배치된 채찍질의 장면이 보여주는 시각의 즉각적인 자극과, 음악을 통해 청각으로 천천히 소름이 끼쳐오는 고통은 어떤 것이 더 아픈 것일까?



'마태수난곡'이 좋아진 그 후

작품이 언제부터 좋아진 건지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처음과 끝, 제1곡 합창과 제68곡 합창이 마냥 멋있어서 음악을 듣기 시작하고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을 불려온 것 같다. 독일어는 몰라도 이 음악의 가사만큼은 모조리 외우겠다던 친구, 자신은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이 음악을 반드시 태교 음악으로 쓰겠다던 담대한(?) 포부를 지녔던 선배,

‘바-라-바’라는 외침에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불협화음이 쓰였다며 그 부분을 꼭 유심히 듣겠다던 한 카메라 감독, 음악회 무대감독 일을 시작한 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청중으로 참여했던 공연들과 끝으로는 '마태수난곡'의 마지막을 수놓는 그 멋진 합창을 자신의 영화 '카지노'에서 불쑥 오프닝 장면에 넣어놓은 감독 마틴 스콜세지까지.

“평생 곁에 두고 읽어”. 이런 표현은 대개 책 혹은 도서와 어울리는 표현일 테지만 '마태수난곡'이란 음악은 평생 곁에 두고 듣는 음악일 것 같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천 번쯤 듣는 것을 목표로. 글과 음악의 환상적인 어우러짐에 대한 감탄은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 글은 자음 하나를 설명해보며 마칠까 한다.

발음은 이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고, 그 모양은 화살을 메긴 팽팽히 시위가 당겨진 무기인 활 같기도 하고, 혹은 오른손에 현을 켜는 활을 쥐고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그 모습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의 끝에 연달아 세 개를 붙이면 그것은 언제는 기쁨일 수도 있고, 언제는 조소와 비난일 수도 있고, 또 가끔은 사랑일 수도 있고. 끝으로는 조금만 손을 보면 언제든 십자가로 변할 수 있는 키읔. 연달아 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