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디지털 종(種)으로 진화하는 인감증명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
인감증명은 ‘희귀종’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 정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제도다. 인감증명은 110년 전에 도입돼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명 기제로 쓰였다. 연간 인감증명서 발급 건수는 3000만 통에 달한다.

디지털 심화라는 환경 변화 속에서 이 희귀종도 진화의 갈림길에 섰다. 사실 디지털 신원 증명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정부는 2022년 디지털화한 신분증인 모바일 운전면허증을 시험 발급하고 시행 중이다. 내년부터는 모바일 주민등록증도 발급할 계획이다. 반면 인감증명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인감증명서는 여전히 관공서를 직접 방문해 발급받아야 한다. 디지털 대체 수단으로 본인 서명 사실확인제도가 2012년 말부터 시행됐으나, 국민 인지도와 편리성이 낮아 대체율은 고작 5%대에 머물고 있다.디지털플랫폼 정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아날로그 유산인 인감증명 제도를 ‘디지털 우선 설계원칙(Digital by Design)’의 관점에서 혁신할 계획이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인감증명 사무를 줄이고 디지털 대체 수단을 모색하기로 했다. 우선 인감증명을 요구하던 2600여 건의 사무 중에서 법령 근거가 없거나 필요성이 낮은 사무 80% 이상을 정비해 나가기로 했다. 올 상반기에 900여 건을 일차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정부는 법원과 금융권 제출용을 제외한 일반용 인감증명서는 정부24를 통한 온라인 발급을 올 하반기부터 시행·확대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관공서나 은행 방문 없이 인감증명서를 간편인증과 모바일 전자서식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자동차 매매 및 양도 의사를 간편하게 확인한 뒤 처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디지털 우선 설계원칙’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기관 간의 협조를 강화하고 다양한 디지털 대체 수단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우선 인감증명서 온라인 발급을 법원이나 금융기관 제출용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등기사무를 관장하는 법원행정처나 대한법무사회와 같은 관련 기관·단체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위·변조, 보안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한다.

행정정보 공동이용 시스템을 통해 인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한다. 행정부와 법원행정처 간 정보시스템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인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면 굳이 민원인이 부동산 등기용 인감증명서를 법원 등기소에 제출할 필요가 없다. 마이데이터, 디지털지갑 같은 다양한 디지털 솔루션과 함께 업무 프로세스 혁신도 중요하다. 금융권이 인감증명서 제출 요구를 줄일 수 있다면 제도 개선 체감도는 커진다. 현실적 유용성을 고려할 때 희귀종 인감증명을 당장 박제화할 필요는 없지만, 원형은 제한적으로만 보존하고 점차 디지털 종(種)으로 진화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