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면서 들린다”…운율의 연금술사가 펴낸 네 번째 시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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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고두현의 시는 노래를 닮았다. 소리 내어 나지막하게 읊조릴 때 그의 시는 우리 귓속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어루만진다. 우리 시대의 서정시인이자 운율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이유다. 최근 출간된 그의 네 번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도 그런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고두현 지음
여우난골
152쪽|1만2000원
‘길’의 이미지를 담은 63편의 시가 실린 이번 시집에서 그는 ‘운율과 말맛’이란 시의 본연을 복원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그 외연을 확장한다. 해설을 쓴 손택수 시인은 “고두현의 시는 그래서 내겐 읽히면서 들린다”며 “나는 그의 시 앞에서 눈과 귀를 다 활용하는 황홀한 경험을 한다”고 했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수록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유심작품상(2023년)을 받은 작품이다.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내 앞을 질러간다”로 시작하는 시다. 이렇게 길과 관련한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감싼다. 슬프고도 애틋한 삶의 풍경들이 스며 있는 시들이다. 고 시인은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지질과 역사의 단면을 길의 이미지로 치환했다”며 “그 길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 사회의 이면, 세계의 표정 등을 시로 썼다”고 말했다.
‘망고 씨의 하루’는 동시대 소시민의 일상을 거울처럼 마주하게 되는 시다. “저 달고 둥근 과즙 속에/납작칼을 품고 있었다니//아프리카로부터/여기까지 오는 동안//노예선을 탔구나./너도.”라고 시인은 썼다. 지치고 소진된 나의 삶과 망고가 겹쳐지고 ‘망고의 씨’는 ‘망고 씨(氏)’로 환기된다. 비교적 짧은 시가 많은 점도 이번 시집의 특징이다. 3~4행짜리부터 10행 안팎의 단시(短詩), 길어도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작품이 많다. 덕분에 시의 운율이 더 도드라진다. “멀다//아직도 골목을 맴돌며/소를 찾아 헤매는//저 빈집의/오랜//침묵!”이 전부인 짧은 시 ‘심우장 가는 길’이 그런 예다. 시인은 “시를 쓰거나 퇴고하는 과정에서 몇 번씩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다”며 “손으로 다듬은 문장 퇴고와 함께 혀로 궁글리는 입말 퇴고에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설명했다.고 시인은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시첩-남해 가는 길’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을 출간하며 맑은 언어,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마음 속의 순수한 원형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늦게 온 소포>는 ‘맑음을 빚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훤히 비치는 거울 같은 시집’으로 평가받는 스테디셀러 시집이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는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남해의 풍경과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현대적 감성으로 향수를 전달하는 시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