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냉동 인간으로 버텨온 '댄'은 행복할 자격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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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기현의 탐나는 책하루는 길고 세월은 짧다. 서로 다른 우리에게 똑같이 심어진 씨앗이 있다면 이런 시간에 대한 감각일 듯하다. 하루가 긴 것은 순간순간 겪어 내야 하는 낙담과 절망들이 너무도 생생한 탓일 테고 세월이 짧은 것은 그 순간의 낙담들이 다 잊힌 채 몇 개의 좋은 기억들만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알지만... 하루하루의 좌절이 도무지 지나가지를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면 빈틈없는 행복이 있는 책이 꽂힌 곳으로 달려가 보자.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의 주인공 ‘댄’은 모든 집안일을 알아서 척척 처리해 주는 로봇 ‘만능 프랭크’의 개발자다. 친구 ‘마일즈’와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해 마일즈는 경영을 전담하고 댄은 오직 로봇 개발에 매달린다. 로봇밖에 모르는 댄은 회사도 만능 프랭크가 씻어 내야 할 고급 접시쯤으로 알았던 것인지 애인 ‘벨’에게 자신 몫의 회사 주식을 선물로 건넨다.이쯤 되니 왜인지 예상되는 전개. 마일즈는 벨과 결탁하여 댄을 회사에서 내쫓는다. 댄의 ‘만능 프랭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빼앗는 것도 물론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댄은 냉동 인간 시스템을 이용해 미래에서 깨어나기로 결심한다. 늙어 버린 애인 앞에서 젊음을 과시하는 복수를 꿈꾸면서.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 (시공사)
아무것도 남지 않는 복수 대신
빈틈없는 행복을 읽고 싶다면
미래로 간 댄은 계획한 복수극을 하나하나 해치운다. 첫 번째, ‘만능 프랭크’의 흔적 추적하기. 냉동 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댄은 냉정한 미래를 마주한다. 모종의 이유로 깨어났을 때 밑천으로 삼으려 했던 재산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댄에게 남은 것은 30년 전의 개발 지식뿐. 30년 전에서 온 로봇 천재 댄은 자신이 설립한, 이제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에 찾아가 자신이 이 회사의 창립자 댄임을 알린다. 회사는 댄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될 것이라 판단, 댄에게 ‘명예 수석 엔지니어’라는 애매한 직함을 부여하고 회사에 머물도록 한다.
두 번째, 이제는 노년에 접어들었을 애인 벨에게 찾아가기. 벨이 냉동 인간 상태의 댄에게 지속적인 연락을 취해 왔기에 댄은 어렵지 않게 벨을 찾을 수 있었는데, 벨은 마일즈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며 댄의 머릿속에서 그려 왔던 것보다도 훨씬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후련함보다는 이상한 허탈함을 안고 댄을 좌절케 했던 두 번째 과거 해결 완료.세 번째, 비로소 행복한 현재를 살기. 댄은 현재의(그러니까 미래로 간 댄의 현재) 가사 도우미 로봇계를 평정한 ‘제도사 댄’의 최초 특허자를 추적하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오직 ‘만능 프랭크’에만 매달렸던 내가 ‘제도사 댄’의 개발자였다고? 의아함에 휩싸인 댄은 절친한 동료 ‘척’으로부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전언을 듣고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가기로 단숨에 결심한다. (이쯤 되니 30년 후의 미래로도 한 번, 30년 전의 과거로도 한 번 행차하는 수고 정도는 치러야 댄을 괴롭히던 크고 작은 낙담들을 바로 잡을 수 있나 싶어 아연해지기도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 댄은 자신이 미래에서 목격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마침내 쟁취한 행복한 현재. <여름으로 가는 문>은 결국 댄에게 그 어떤 낙담도 남겨 두지 않고 행복한 현재를 선물한다. 완벽히 통쾌하고, 완벽히 행복하다. 30년쯤은 동네 마실 가듯 오가는 댄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에게도 책 한 권의 빈틈없는 행복이 주어진다.
그리고 댄은 그럴 자격이 있다. 넘치도록...
정기현 민음사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