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호 작가의 작품을 보고 왜 '민들레 와인'이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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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1 영화 <북샵>
플로렌스는 이제 여기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는 큰 저택에서 홀로 살고 있는 브런디쉬 뿐인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서점을 내고 터를 잡으려 한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드디어 서가가 만들어지고 주문한 책이 도착하고 서점의 모양이 잡혀 간다. <The Old House Bookshop>. 서점이 생기고 사람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인다. 책장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월리와 소년들, 책방에서 일하게 된 똑똑하고 야무진 그러나 책은 읽지 않는 소녀 크리스틴 그리고 서점이 생긴 것이 내심 기뻤을 브런디쉬씨의 편지와 오며 가며 서점을 기웃거리는 마을 사람들로 작은 온기가 생겨난다.브런디쉬씨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책방을 내주어서 감사하며 좋은 책이 나오면 보내 달라고 말이다. 플로렌스는 고심 끝에 책을 보내고 흡족한 마음을 담아 브런디쉬씨가 답장을 보낸다.
“시집이나 소설은 보내주지 않아도 되는데 레이 브래드버리의 책은 빨리 더 보내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브런디쉬씨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대표작 중 하나인 <화성 연대기>. 그리고 그는 <민들레 와인>을 기다리는 편지를 쓴다.“<민들레 와인>은 금방 올까요? 레이 브래드버리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요.”
오호, 레이 브래드버리라!
# 2 노상호 작가의 ’홀리‘전당신은 어딘가 1920년대 즈음의 미국 중부 작은 마을의 외딴집처럼 느껴지는 그곳이 집 뒤 숲과 함께 타오르는 정경 앞에 놓인 기괴한 모양의 눈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크기의 눈사람, 누가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은 크기에 머리가 두 개 올려진 눈사람. 웃는 얼굴처럼 눈코입을 붙여 놓아 배경의 타오르는 불길이 전혀 위협처럼 보이지 않는 눈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뭐지? 다소 낯선 감각이지만 흥미롭다. 불타는 배경과 거대하고 기괴한 눈사람. 어딘가 분명 이상해야 하는데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왜지?
시선을 돌려보니 중세 유럽의 삼면화를 떠올리는 그림 석 점이 있다. 삼면화라고 해서 조토의 삼면화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석 점의 그림은 제단화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노상호의 삼면화는 ‘고스트라이더’와 ‘교회 첨탑을 등지고 서 있는 거대한 눈사람’ 그리고 AI를 활용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오류인 토끼 인형을 딛고 선 ‘미카엘 천사장’이다. 작품의 소재 때문일까 제단화처럼 다가오는 이 작품들은 기괴한 감정을 유발한다기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익숙한 소재의 - 의도적 혹은 우연의 산물로서의 - 변형으로 인해 흥미롭게 다가온다.
노상호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상당히 영화적 이미지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전시를 기획한 아라리오 갤러리의 박미란 팀장에게서 설명을 듣고 도록에 실린 국립현대미술관 홍이지 큐레이터의 글을 읽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상호 작가가 디지털 매체와 '협업'한 이 작품들은 작업 과정도 흥미로운데 작가는 매일의 이미지를 수집해 그것들을 그리고 그 이미지를 디지털 환경에 업로드한다. 그 결과물들은 종종 오류를 수반했는데 노상호 작가는 그 오류들을 다시 옮겨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노상호 작가는 AI와 '협업'을 한다고 말한다).[1]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을 얻게 되는 일련의 프로세스는 작가가 디지털 매체에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한 명령어를 입력했을 때 디지털 매체가 수집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이미지가 결국 영화의 스틸이 많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런 작업 과정으로 탄생한 작품은 관객들에게 영화적 이미지로 와 닿게 되는 이유를 가지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지금보다 딥러닝이 덜 되었던 시기의 작품들은 그래서 여섯 손가락이 달린 사람의 손, 눈동자가 두 개씩인 눈을 가지고 있는 소년의 얼굴, 환상인지 환각인지 모를 쌍두 사슴과 말, 불타는 배경을 가진 거대한 눈사람 그리고 그 앞에 작은 눈사람이나 소년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제는 여섯 손가락이 달린 사람의 손을 도출하기 위해 명령어를 입력해도 다섯 손가락이 있는 사람의 손이 그려진다고 한다.
노상호 작가의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비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가지는 회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야기의 분절화, 파편화를 가져오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이야기가 이미지화될 때 그 이미지는 단편적이고 얇지만 분명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작품이 된다.
이토록 흥미로운 노상호 작가의 작품들을 보다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민들레 와인>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민들레 와인>
열두 살 소년 더글러스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해가 떠오르고 더글러스의 손짓으로 1928년의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절 그곳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여름은 민들레 와인을 마시는 시기이다. 시간을 지나온 민들레 와인은 여러날들의 나른함과 소리들과 움직임과 공기를 담고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 스스로의 자전적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써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단순하지 않다.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 풀어놓아진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은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의 향수와 함께 기묘하고 이상한 꿈 속을 헤맬 때의 긴장과 오싹함과 호기심을 자아낸다.
더글러스는 현실과 상상과 환상이 결합된 유년기의 여름을 보낸다. 그 시기는 레모네이드를 만들고 와인을 만들고 차가운 차를 만드는 여름만의 의식에 끼워 넣어진 '지금과 과거'의 시간, 여름의 더위를 잠시 지우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과 (아이들이 보기에는 어린 시절이 없었던, 아주 나이가 많고 늙은) 젊음으로 충만했던 과거를 기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벤틀리 부인, 마녀와 행복 기계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아스라하고 바스라질 듯한 유년기의 기억을 들쑤신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민들레 와인>의 서문에서 자신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단어들을 쓰고 단어들을 가늠하고 다듬어가면 인물이 생겨난다’고 말이다.[2]
스스로의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어떤 것들이 건져 올려지는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악몽, 밤에 대한 두려움, 사과나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의 여름들을 떠올렸고 그 세월에서 따 모아진 민들레를 <민들레 와인>에 붓고 환상 한 스푼, 기억 한 조각, 어렴풋하고 어스름한 그림자 한 꼬집 등을 섞어 환상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 4 당신이 민들레 와인을 마셨던 그 때
결국 이야기란 모아진 소재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여러 층을 가지게 된다. 노상호 작가의 작품 '홀리'를 보면서 떠오른 영화적 이미지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민들레 와인> 속 더글러스의 그 여름의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매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디지털 매체에 넣어 새로운 이미지를 도출하고 거기에 또다른 서사와 작업을 덧입혀 독자적인 작품을 내놓는 노상호 작가와 매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하나에 기억과 상상을 입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레이 브래드버리는 그래서 대단한 이야기꾼이 아닐 수 없고 그 이야기는 대단히 매혹적이 아닐 수 없다.
아아 ... 브런디쉬씨가 <민들레 와인>을 읽지 못한 채 세상을 뜬 것은 정말 유감이다.
신지혜 칼럼니스트·멜팅포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 <노상호. 홀리> 도록 중 홍이지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글 발췌. 아라리오 갤러리(2024)
[2] <민들레 와인> 서문. 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