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처럼 쌓인 군침 도는 '볼롱의 버터'…그런데 왜, 상온에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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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미술관좋은 작품은 바로 마음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꽂히는 것’이다. 앙투안 볼롱(1833~1900)의 ‘버터 더미(Motte de Beurre)’가 그렇다. 하, 그 버터 참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버터의 질감이 너무나 좋은데 비단 기름으로 그린 그림이라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걸 뛰어넘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매혹된 나머지 손가락을 푹 찔러 버터를 한 입 맛보고 싶을 정도다. 물론 비위생적이니 자제하는 게 좋겠지만.
냉장기술 대중화 이전 시기
버터는 상온에 두고 먹던 식재료
유럽 버터는 지방 함유 82% 달해
풍미 가득했던 그시절 식탁 풍경 떠올라
음식평론가이다 보니 나는 이런 작품을 보고도 좀 결이 다른 걱정을 한다. 아니, 이 많은 버터를 그냥 상온에 둔 거야? 그리고 바로 나의 멍청함을 깨닫는다. ‘버터 더미’는 1875~1885년 사이에 그려졌고 우리가 아는, 프레온 가스를 냉매로 쓰는 냉장고는 1918년이 돼서야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이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냉장기술 대중화 이전이었으니 버터는 그렇게 상온에 두고 먹는 식재료였을 것이다.그렇게 먹어도 안전했을까?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지방은 극단적인 환경을 조성해 미생물 번식을 억제하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양식에는 동물의 지방에 고기를 조리듯 서서히 끓여 익히는 콩피(confit)라는 보존법이 있다. 지방에 서서히 끓인 뒤 건지지 않고 그대로 둬 굳히면 안의 고기가 보존된다. 따라서 냉장고가 있는 요즘도 버터를 상온에 두고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맛은 썩 좋지 않을 것이다. 20도의 상온이라면 버터가 너무 녹아 기름져서 제맛을 못 느낄 수 있다. 그림에 매혹되더라도 따라 하지 말고 버터는 냉장고에 두고 먹을 것을 권한다. 원래 싸여 나오는 포장째로 뒀다가 먹을 때마다 조금씩 저며 얹거나 바른다. 예를 들어 따뜻하게 구운 빵에 차가운 버터를 얹으면 온도와 질감의 대조가 먹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지방 함유량이 높은 버터일수록 냉장고에서 꺼내더라도 상온에서 금방 부드러워지며 제맛과 질감을 내준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버터는 지방 함유량이 최소 82%에 이른다. 볼롱의 버터도 지방이 매우 풍부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주재료인 크림을 발효시켜 느끼함도 덜하다.
그렇다면 볼롱은 자신이 먹으려고 저 많은 버터를 산 걸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일단 버터의 풍모가 갓 만들어 나온 듯 보인다. 버터는 우유의 크림을 원심력으로 분리한 뒤 반죽해 물기를 최대한 걷어내 만든다. 볼롱의 버터를 자세히 보면 모양을 막 잡아낸 지방의 결의 생생하다. 두르고 있는 천 또한 당시 버터의 보관에 많이 쓰인 눈이 고운 면포 같다.작품의 버터가 볼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실마리는 또 하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이므로 당시의 버터에는 방부제로서 소금 양념이 돼 있었을 것이다. 요즘도 프랑스산 가염버터는 무게 대비 1.5~2%의 소금을 더하는데 꽤 짠 편이다. 따라서 부인과 아들 둘의 네 식구인 볼롱 가족이 먹자고 이만큼을 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작품의 달걀과 견줘 보면 그 양을 파악할 수 있다.
말하자면 버터가 모델로 출연했을 거라는 말인데, 이처럼 정물이 볼롱의 작품 세계를 아주 풍요롭게 구축해 줬다. ‘춘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팬이었다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듯, 볼롱의 작품은 오늘날 상당수가 개인 소장품이다. ‘버터 더미’는 미국 워싱턴DC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