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외국인에게 보여주려고 쓴 '코리아 안내서' [서평]

신간
1948년부터 현재까지 근현대사 개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 다뤄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오륜기 게양, 최종주자 임춘애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지성 팍, 강남스타일?"

몇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인을 만날 때 으레 쏟아내는 질문이 자조의 대상이 되곤 했다. 김치부터 시작해서 국내 출신 유명 스포츠 스타, 대중가요 등을 아는지 확인하는 물음들이다. 자부심의 표현인 것과 동시에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몇년만에 비슷한 질문을 하기 민망할 정도로 BTS,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 폴더블폰 등 수많은 K팝과 콘텐츠, 기업 등이 세계 주류 시장에서 대세가 됐다. 그래도 아직 우리 마음 속에 남은 인정 욕구가 있다면 <새우에서 고래로>는 그것을 마저 채워주는 '한국 안내서'다. 스페인 출신으로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국제 관계학을 가르치는 저자 라몬 파체코 파르도는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한국과 처음 연을 맺었다. 이후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학교 한국 석좌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쓴 이른바 '한국통'이다.

2022년 영국에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1948년부터 현재까지 연대기 순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개괄한다. 총 6장으로 구성됐으며 시대별로 정치·사회·문화·경제 등의 측면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분석한다. 책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약한 새우가 아니라 당당한 고래의 위치에 올라선 한국의 변화를 통시적 관점에서 다룬다.

저자는 책을 쓰기 전에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영상을 수차례 돌려봤다고 한다. 한국 사회 변화와 발전의 핵심 원동력이 된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장면이라서다. 당시 개막식에선 과거 일제강점기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마라토너 손기정이 66세의 노장이 돼 성화를 들고 달리는 모습이 감동을 줬다. 단군 시대부터 일찍이 자리잡은 한민족이란 개념은 각종 수난의 역사를 거치며 강화됐다. 때때로 민족이란 강력한 구심점은 국가와 독재 정권의 통치를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올림픽을 지나 1990년대 들어서선 민족에서 한층 진화해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새로운 정체성이 등장했다. 바로 시민이다. 전통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되, 세계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보편적인 평등과 인권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태동했다. 저자는 이를 일컬어 '시민 민족주의'라고 정의했다.

저자가 국내 경제 발전의 역사를 분석하는 시각도 상당히 정확하다. 서구 국가들이 100년, 200년 동안 이룩한 발전 단계를 한국이 불과 20~30년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있다. 저자는 개발국가 시절 급성장한 대기업뿐 아니라, 2000년대 들어 정부 지원을 통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확장한 정보기술(IT) 및 바이오 기업 등의 사례에 주목한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업가와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정부 간의 공생 관계가 한국 경제의 특징"이란 설명이다.

책에선 한국 사회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도 꽤나 비중있게 다룬다. 국내 최초로 이화여대에 여성학 교육 과정을 만든 여성 인권 운동의 상징 이효재 교수부터 호주제 폐지, <82년생 김지영>의 유행, 낙태죄 위헌 결정까지 국내 여성 인권사의 주요 변곡점을 충실히 담았다. 여기에 초기 성소수자 단체 활동과 방송인 홍석천의 커밍아웃 등 퀴어 운동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저자는 변화에 열린 개방성이 곧 한국인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70여년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격동의 역사를 모든 분야에서 충실히 다 담으려다 보니 책의 서술 방식이 다소 나열적인 건 불가피하다. 그 과정을 직접 겪어 온 내부자의 입장에선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찾기 어렵다. 원래 외국인에게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만하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