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사기꾼' 리플리, 이번엔 흑백 드라마로 정신을 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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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스콧 주연, 넷플릭스 8부작
맷 데이먼의 (1999)보다 세밀해진 범죄극
부호의 마음을 뺏는 데 성공한 톰은 그가 건넨 돈과 명품 옷까지 챙겨 출발한다. 이탈리아의 고급 휴양지 아트라니. 해변에 팔자 좋게 늘어진 디키, 그의 연인 마지(다코타 패닝)가 보인다. 톰이 우연히 마주친 척 미소를 짓는다. ‘나 기억 안 나? 우리 친구잖아.’
이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볼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스티븐 자일리언은 지루해지기 딱 좋도록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 1995년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 각본상을 받았고, <머니볼>(2012), <아이리시맨>(2020) 등을 썼던 그의 승부수는 성공한 것 같다. <리플리: 더 시리즈>에는 잘 만든 범죄물과 심리 스릴러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새롭다. 이번 톰을 연기한 앤드루 스콧은 40대 중반(1976년생)이다.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이 보여준, 눈부신 청춘의 느낌이 없다. 미남도 아니고 체구도 크지 않다. 이 때문에 형사 라비니(마우리치오 롬바르디)와 맞설 때는 주인공답지 않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영화 <리플리>의 톰(맷 데이먼)처럼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부르며 디키(주드 로)의 마음을 사로잡던, 로맨틱한 천재도 아니다. 그는 용의주도하고 꿋꿋한 범죄자 그 자체다. 드라마는 건조한 시선으로 그의 고요한 표정, 말 없는 뒤통수, 흉기 앞에서 망설이는 손가락을 관찰한다.
디키의 친구이자, 톰을 의심하는 프레디 마일스(엘리엇 섬너)와의 재회, 범행 수법 또한 살짝 다르다. 소년처럼 여리여리한 프레디는 모호한 성적 정체성으로 톰의 내면을 건드린다. 톰이 신은 것이 디키의 페라가모 구두인 것을 알아채고 비웃는 것도 그다.분명한 것은, 영화 <리플리>의 덩치 큰 프레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이 인상적으로 연기한)보다 ‘부축’하기엔 가벼워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 로마의 밤을 말없이 오가는 택시 기사들, 범행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미소 짓는 호텔 직원들. 그 속에서 톰은 자신의 범행을 수습하느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단한다.
분위기가 차갑고 건조하지만은 않다. 이탈리아의 아트라니, 로마, 베네치아 등의 아름다운 풍경, 조각상과 건축물들이 사건 사이사이를 채운다. 톰은 이곳에서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의 그림에 매혹된다. 폭행,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중에도 명작들을 그려냈다는 점 때문일까.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카라바지오의 그림들은 드라마의 시공간을 어느새 공유한다. 음영이 뚜렷한 그의 그림들은, 막바지 톰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열쇠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톰은 그림을 볼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이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이 없었던 디키와는 다르다.
그림에 대한 감식안은 마지막 도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엔딩이 크게 갈리는 것도 이 지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맞았던 두 편의 영화와 달리, 이번 드라마의 톰은 나름대로 열린 결말을 맞는다. 그를 쫓던 형사 라비니에게도 마찬가지다.
김유미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