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30주년 맞은 '장미빛 인생', 알고보니 코리안 뉴웨이브의 상징작

영화 리뷰
한국 사회상, 역사적 진실 자유롭게 다뤄
멜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
영화 <장미빛 인생> 스틸컷 ©KMDb
검은 모자를 눌러 쓴 남자, ‘동팔’ (최재성)이 거리를 걷고 있다. 동팔은 낡은 건물 지하 깊숙이 박혀(?) 있는 만화방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들어간다. 가게의 벽에는 가게보다 더 낡아 보이는 텔레비전이 전두환의 9시 보고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텔레비전 앞에는 일용직을 끝내고 온 남자들에서부터 동네 양아치들까지 꽤 다양한 종류의 ‘하층민’들이 빼곡하다. 자정이 지나자 만화가게의 ‘마담’ (최명길)은 심드렁한 얼굴로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한량들에게 심야요금을 걷는다.

1994년에 개봉한 <장미빛 인생>은 1980년대, 가리봉동에 위치한 한 작은 만화방을 배경으로 한다. ‘만화방’을 채우고 있는 만화책이 그러하듯, 가게는 늘 ‘문학적’이지 못한 3류 인간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80년대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마주쳤을 법할 세속적인 얼굴과 세속적인 고민을 안고 사는 군상들이다. 영화 <장미빛 인생>은 그렇게 사회의 가장 어둡고 낮은 공간에서 그보다도 더 암울한 1980년대의 한국을 그린다.
영화 &lt;장미빛 인생&gt; ©네이버 영화
<장미빛 인생>은 이른바 ‘코리안 뉴 웨이브’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1961년부터 이루어지던 군부 독재 검열의 시대가 끝나고 한국영화는 비로소 한국의 사회상, 역사의 진실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금지했던 영화적 재현, 예를 들어 학생 운동, 가난의 묘사, 정치사회적 비판 및 풍자 등이 영화의 주제, 혹은 소재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등장한 것도 ‘코리안 뉴 웨이브’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던 요소다. 이장호, 정진우, 이두용 등 기성 감독에 이은 김홍준, 장선우, 박광수 등의 출현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한국영화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들이 모두 독일, 프랑스 문화원을 전전했던 ‘시네필’ 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시네필 문화와 관련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노란문>을 통해 볼 수 있다).
영화 &lt;꽃잎&gt; 포스터와 스틸컷 ©네이버 영화
애니메이션 (장선우의 <꽃잎>)이나 환타지적 요소 (이명세의 <첫사랑>)를 포함하는 실험적인 스타일들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영화는 정치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 장선우 감독의 <꽃잎> (1996)은 한국 영화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전면에 다룬 영화이면서 시위 장면 (상업영화에서)을 여과 없이 재현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장미빛 인생>의 초반에 만화방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지는 ‘전두환 발(發) 뉴스’ 역시 이전 시대였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장면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장미빛 인생> 역시 ‘코리안 뉴 웨이브’가 주도했던 역사적 회고, 그리고 사회비판적 요소를 도처에 드러낸다. 이는 학생운동을 위해 위장 취업을 했다가 경찰에 쫓기는 캐릭터 ‘기영’ (차광수)을 통해 보여지기도 하고, 역시 학교를 그만둔 대학생 ‘유진’ (이지형)을 통해 엿보이기도 한다.
영화 &lt;장미빛 인생&gt; 스틸컷 ©네이버 영화
무엇보다 <장미빛 인생>은 리얼리스트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의 도시 재현을 필두로 한 시각적 성취가 빛나는 작품이다. 가령 동팔이 선을 보고 온 후 중고만화를 떼러 가는 마담을 따라다니는 장면이 그러한 예다. 순간의 욕망을 참지 않고 마담을 범한(?) 동팔이 그녀에게 죄책감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품게 되면서 그는 마담이 가는 곳을 하염없이 뒤쫓는다.

중고 책방이 늘어선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이 두 남녀를 카메라는 밀착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지켜본다. 마치 <나인 하프 위크>에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를 거닐고 다니는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를 연상하게도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런 멜로적인 도시 스케치는 곤봉을 들고 학생들을 쫓는 전경들의 난입으로 급작스럽게 중단된다. 도시의 서정성이라는 것이 1980년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이 극명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동팔은 자신의 몸을 덮어 마담을 최루탄으로부터 보호하고 이 시점부터 이들은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자는 마담의 동생이자 도망자인 기영과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한다. 늘 그렇듯, 하층민의 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난다. 이들은 허름한 간판과 집들이 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키스 대신 길고도 애틋한 포옹을 나눈다.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만 끝났어도 어쩌면 아름다웠을 테지만 이들에게는 포옹으로는 끝나지 못할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lt;장미빛 인생&gt; 스틸컷 ©KMDb
<장미빛 인생>은 멜로 영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이고, 사회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멜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만화방을 채우는 사람들이 살아가던 그 시대, 즉, 폭력과 억압이 일상과 의식이 되어 버린 그 공간에서 밑바닥 인생의 사랑은 사회적인 굴레를 넘을 수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장미빛 인생>에는 장미빛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있다고 믿으며 혹은 그것이 올 것이라 믿으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투와 연대가 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